좋은 글을 읽으면 쓰고 싶어집니다. 쓰다 보면 쓰기 싫고, 그러다 또 다른 좋은 글을 찾는 식이지만요. 글쓰기 근육은 없지만 좋은 글을 소개하는 것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일찍이 좋은 글이라 함은 ‘주제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누구나 그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글’이라 들었고, 저도 그 말이 좋았습니다. 그런 글이 어디 있나 찾다가 어린 시절 너무 좋아해서 옆구리에 끼고 자던 두 권의 동화책이 생각났어요.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샬롯의 거미줄>입니다.
#1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불이 난 집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어린 동생을 안고 뛰어내리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동생 스코르판은 몸이 약합니다. 항상 소파에 누워 지내며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형 요나탄은 매일 밤 또 다른 (사후)세계 낭기열라 이야기를 들려주죠. 그곳에서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을 거라고요. 창문으로 자신을 안고 뛰어내려 먼저 세상을 떠난 요나탄을 그리워하던 스코르판은 얼마 뒤 낭기열라에서 형과 재회합니다. 낭기열라에서 이어지는 두 형제의 모험엔 언제나 행복과 재미, 그리고 죽음이 있습니다.
엄마는 이 책을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모든 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입버릇처럼 말하고, 부지런히 필사도 합니다. 한번은 뭐가 제일 좋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할머니는 어린이에게 ‘죽음’조차도 정말 쉽게 알려주잖아.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지.”
그러고보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다섯 살 남짓의 저에게 죽음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개념 그대로의 죽음을 머리로야 모르지 않았겠지만, 이를테면 죽은 형과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마음이라든지, 몸이 아픈 나(스코르판)도 곧 죽게 될 거라는 마음 같은 건 제가 아는 무언가에 대입해 유추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니잖아요. 아마 그 무렵의 저는 죽음이라는 걸 가까이에서 경험한 적이 없어서, 책 속 이야기 정도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엄마 말을 듣고 보니, 제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물을 데 없는 마음의 답을 이 이야기 속에서 찾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나 무섭고, 슬프고, 혼란스러우며, 때론 당연하고 가깝기도 한 마음. 죽음이 무엇인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책을 덮고 나면 그 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2
실은 저는 <샬롯의 거미줄>을 더 좋아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옆구리인지 머리맡인지에 두고 잔 건 이 책 하나였던 것 같아요. 얼마나 좋아했냐면 글자 읽는 법을 모를 때부터 엄마 목소리로 이어질 다음 대사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아침의 헛간, 윌버와 샬롯이 서로를 바라보는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한 풍경은 오랫동안 제 마음속 꽤 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거미와, 돼지와, 소녀와, 심지어 욕심 많은 쥐와 양까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샬롯이 죽었을 때는 아주 슬펐습니다. 샬롯은 이미 죽었는데 또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이어진다는 사실이 밉기도 했지요. 그런 휘몰아치는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월버가 샬롯을 만나고 샬롯이 윌버를 살리기까지, 윌버가 죽은 샬롯을 행사장에 두고 돌아오기까지,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기까지, 샬롯이 죽기 전 받아온 알주머니에서 샬롯의 새끼들과 만나기까지. 다시 보니 모든 과정이 그렇습니다. 책을 덮으면 정말이지,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흐른다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구나 싶습니다.
밉다가도 그립고 아프다가도 아름다운 그 이상한 마음은 무엇이었나. 여전히 한 단어로 말하긴 어렵지만 근거 없는 여운은 아닙니다. 이 책을 닳도록 읽은 어린이가 전 세계에 저 혼자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리고 그 마음의 출처를 조금 더 정확히 짚어주는 싶은 한 편의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이 책 속 이야기만큼 좋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 글을 읽는 게 제 목표입니다. <샬롯의 거미줄>을 한 번이라도 좋아했다면, 혹은 지금이라도 책을 읽고 나서 함께 본다면 더없이 좋은 글이니 꼭 읽어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