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커신은 ‘청렴하고 온정 있는’ 사회복지사입니다. 근무시간에 틈이 있을 때면 수려한 글쓰기를 해냅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실을 두드리며 정교한 펠트 인형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근무시간에 블로그를 보다가 수학커신의 사슴업무법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쿡쿡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청렴하고 온정한 이가 사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무시간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내는 그에게 감탄합니다. 도파민이 느껴져 숨이 가벼워지는 글, 사람 사는 글을 벗님들과 나누고 싶어 그를 초대했습니다. 저는 그가 사회복지사인 동네에서 지낸다면 틈의 민들레를, 지나가는 개미를 지그시 눈 담게 될 것입니다.
*주의* 미리 양해 말씀 드립니다. 이 글에는 비속어가 있습니다.
사슴업무법
나는 대학생 때부터 사슴 공부법으로 많은 난관을 헤쳐 왔다. 사슴공부법이란 사냥꾼이 가까워질수록 죽도록 달리며 최고 기량을 내는 사슴처럼, 시일이 가까워져서 문제 처리를 시작하면 최고의 기량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학계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궁극적으로 사슴과 내가 다른 점은 잡아먹히지 않는다는 것이기는 하지만 뭐 아무튼 난 대학생 시절부터 사슴공부법을 애용해왔다. 그렇게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무능한 사회인이 되었고, 유일한 공부법인 사슴공부법은 이후 사슴업무법으로 진화하였다.
풋내기 사회인 시절, 나는 남들에겐 말 못 할 비밀인 사슴업무법으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주변이랑 좀 친해진 후 내 비밀을 공유하자 사람들은 그냥 벼락치기 가지고 뭔 사슴업무법이냐며 면박을 줬다. 하지만 사슴업무법 외길 10년 인생, 남들이 뭐라 해도 난 사슴업무법을 고수하고 있다. 왜 갑자기 사슴무새가 됐는고 하니 오늘도 내가 사슴업무법으로 일들을 오지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사진1) 또 한 건 해버렸다구~
2월의 첫날은 녹록지 않았다. 이사를 앞둔 시기라서 이래저래 처리할 게 많아 개인적으로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에서 2월이 되면 슬슬 사업이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스멀스멀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심지어 구청에 내는 우수사업 신청서를 기관에서 나한테 맡겨서 지난달 중순부터 얼레벌레 쓰고는 있었는데 그게 기한이 열흘 정도밖에 안 남아서 휴가 전에 가안을 내야 했다. 사실 공고가 1월 중순에 나와서 시일은 굉장히 넉넉했고 성실한 직장인이라면 차근차근 일을 처리했겠지만, 나는 사슴업무법의 정통 계승자로서 미리미리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2) 1월 내내 그저 꿀잠 중
1월 말부터 조금씩 쓰기는 했지만 5장 분량 중 양식 채우기인 2장 정도만 써두고 기획하는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한다는 핑계로 탱자탱자 놀아버렸다. 그러다 이번 주 월, 화에는 주말 출근이 도입될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이슈로 회사가 어수선한 틈을 타 분위기에 편승해서 놀아버렸다. 그러다 어제 저녁부터 호다닥 쓰기 시작해서 한쪽만 써두고 퇴근을 갈겨버렸다. 심지어 상술했듯 이사 때문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약간의 스트레스가 쌓이자 업무 효율이 미친 듯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난 느낄 수 있었다. 사냥꾼이 쫓아오고 있었다.
(사진3) 내 솜씨를 제대로 보여줄 시간이군.
오전 내내 업무 집중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올해 들어 팀이 바뀌고 내가 제대로 일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팀장님은 옆에서 왜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고 일이 그렇게 많냐고 물어보셨고 난 ‘오전 중, 사업계획서 완성 가능할 듯합니다’라고 믿음직하게 한마디 갈기고는 계속 일에 집중했다. 미친 듯한 업무 효율을 뽑던 중, 전 팀의 과장님이 작년 지원사업에서 추가 지원 인원으로 내 담당 주민을 추천하셨고, 해당 주민의 추천서와 신청서까지 오늘 중에 준비해달라 요청하셨다. 사냥꾼이 내 뒷덜미를 잡을락 말락 하는 순간이었다.
(사진4) 갸아아아악
하지만 나는 콘크리트 정글의 한 마리 고독한 톰슨가젤(초원에만 삼).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을 순 없었다. 키보드가 부서지냐 내 뇌가 부서지냐? 싸움이 시작됐고, 점심시간 지나서 사업신청서를 클리어, 오후에 주민 및 유관기관과 소통하며 지원사업 신청서와 추천서를 따닥 클리어해냈다. 오늘은 영락없이 블로그에 글도 못 쓰고 퇴근해서 이삿짐 싸게 생겼구나 했는데 웬걸? 여유 시간이 한 시간이나 생겨버린 것이다. 이에 오늘의 공적을 남기기 위해 이 사슴의 거친 달리기를 글로 남겨두는 중이다.
(사진5) 다시는 사슴을 무시하지 마라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자여, 사슴업무법을 기억하라. 다가오는 시일과 뒷골이 당겨오는 스트레스가 당신의 다리를 저절로 뛰게 해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어찌저찌 일을 처리할 능력이 솟아날 것이니 의심치 말지어다. 결과물의 퀄리티는 결코 보장할 수 없지만 뭐 나중에 다시 손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계획형 J의 이단아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지만 뭐 어쩌라고. 심지어 사슴업무법도 대책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세심한 계획을 통해 실행이 된다. 난 오늘도 사냥꾼을 따돌리고 유유히 달리며 빠큐를 날려주고 있다. 당신도 당신 안의 위기 대처 능력과 초인적인 힘을 믿는다면 사슴 업무법으로 업무를 해결해보라. 만약 다음 주에 내가 글을 못 올린다면 사업계획서 개같이 써서 붙잡혀서 혼나는 거니 그런 줄 아시고. 업무 다 엿머겅~
<후기>
사슴업무법으로 끝낸 사업계획서는 휴가 복귀 이후 두고두고 수정을 거쳐 겨우 시일에 맞춰 제출하였다. 첫 업무를 본 팀장님은 내가 생각보다 꼼꼼하지 않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으신 듯하다. 앞으로 잘해야지 싶은데 앞으로의 나한테 나도 딱히 기대가 안 되긴 한다. 뭐 시일 내 내고 크게 빵꾸 안 냈으면 된 것 아닐까? 나 같이 살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