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플 뮤직 신곡 알림이 울렸다. 한때 참 많이 들었던 당신이 좋아하던 그 가수. 멍하니 알림을 한참 보면서 당신을 생각하다가 ‘한심하게 뭘 하고 있는 거냐’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림 하나가 돌아가기 버튼처럼 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이제 잘 안 듣는데 애플 뮤직 멍청하네’
한참 그 가수의 노래를 많이 들었을 땐 당신이 좋아하던 음악, 영화, 음식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땐 왜 그랬을까? 나와는 다르게 삶을 참 열심히 사는 당신이 궁금했고, 인류애가 떨어지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남의 일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당신의 따뜻함이 좋았다.
4년 전도, 지금도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선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꽃이 조금이라도 더 화창할 수 있도록 꽃병을 선물하는 일 정도라는 것도.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걸까? 10년쯤 지나면 질문에 답을 찾게 될까?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도 시간은 흐른다. 다만 하필이면 흔한 당신의 이름을 다른 곳에서 마주할 때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음악, 영화, 음식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악의가 하나도 없는 당신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똑같은 질문 앞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당신을 만나면 ‘좋은 친구’처럼 즐거운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게 되겠지. 난 누구를 속이고 있는 걸까?
당신이 좋아하던 그 가수의 새 앨범은 무난히 듣기 좋았다. 듣는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느라 가사에 집중이 되지 않았을 뿐. 다 듣고 나서 생각했다.
‘멍청한 건 애플 뮤직이 아니라 나였네’
#2
러닝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뛰었는데 일이 바빠지거나 날씨가 폭염, 혹한이 되면서 뛰는 걸 포기했는데요. 올해는 조금 더 꾸준히 뛰는 걸 목표로 잡았습니다. 인간의 습관이 자리 잡는 데에 1년이 걸린다고 하던데 내년엔 뛰는 게 익숙해지겠죠?
한 달 정도 뛰다 보니 3km, 5km, 8km 점점 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점점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더라고요. 주변 사람들과 러닝 이야기를 하면 “언제 대회 나가요?” 같은 질문을 받는데요. 보통 체력을 키우거나, 살을 빼거나 건강을 위해 뛰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특별한 이유 없이 뜁니다.
뛰다 보면 갖가지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사라집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은 삶인지, 그땐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반대로 그땐 왜 그렇게 했는지… 갖가지 생각을 하다가도 5km쯤 지나면 뛰면서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만 하거든요.
사실 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5km 전에는 다른 생각과 같이 머릿속을 휘젓다가도 5km가 넘어가면 ‘그만 뛰고 싶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합쳐지더라고요.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빨리 이 뛰는 행동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것. 제가 찾은 러닝의 유일하고,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제 올해 목표는 10km 뛰기입니다. 더 멀리, 더 오래 뛰면서 다른 생각을 안 하는 게 목표인 셈입니다. 지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으신가요? 나가서 뛰어보세요.
#3
‘정신의학과’ 간판에 달린 단어만 봤을 땐 무시무시할 것 같았다. 근데 들어가 보니 별 거 없었다. 접수대에서 이름을 이야기하고 잠깐 앉아 있다 보니 듣고 싶지 않아도 주변의 대화가 들렸다. 집중력 저하부터 감정조절, 불면증까지. 갖가지 평범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 정도면 ‘일상생활의학과’ 이런 걸로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의사는 나에게 매번 모든 걸 설명했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내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으레 하는 형식적인 설명이었을까? 특히 약을 처방할 땐 자신도 복용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비유도 추가했다.
“약은 방파제 같은 역할이에요. 강한 파도를 그대로 맞지 않도록 완화 시켜주는 거죠.”
의사의 말은 진짜였다. 약을 먹으면 고요해졌다. 진짜로 세상이 고요한 건 아니었고, 여전히 내 삶은 엉망이었지만 묘한 고요가 찾아왔다. 위아래로 요동치던 그래프가 직선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약은 금방 끊을 수 있었다. 약이 없어도 파도가 치지 않았다.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반적인 처방 기간보다도 빨리” 약이 필요 없는 삶이 됐다. 오히려 내 삶은 약을 먹을 때보다 더 고요했다. 약이 없어도 딱히 우울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대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우울한 일이 없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어졌다. 무뎌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기대가 없어서 실망감이 없어진 것 같기도 했고, 갖가지 즐거움이 무의미한 만큼 온갖 걱정과 슬픔도 무의미해졌다. 폭우가 치던 바다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같아졌달까.
그사이에 내 삶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다니던 직장이 없어졌고, 새 직장이 생겼다. 그럭저럭 비슷한 일을 하면서 월급도 올랐고. 다음에 살게 될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할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면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등등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삶에 끼어들어서 멀리서 보면 꽤 살만한 삶이 됐다.
어쩌면 삶이 이렇게 별다른 즐거움과 슬픔도 없이 검은색과 흰색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무채색으로 지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 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