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눈부시게 빛나는 하루
짙은 녹음이 깔린 정원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었다.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환하게 빛났다. 이곳은 경기도 북부의 깊은 숲속, 나는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지난 2월, 결혼을 세 달 앞두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한다.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 예정일이었다. 헤어지지 않았다면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었을 그와 나. 이날을 마주할 자신이 없던 나는 죄책감을 안고 멀리 숨어 들었다.
이곳에서 작은 캠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라면 나 자신을 숨길 수 있으리라. 빼곡한 스케줄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숨만 쉬고 살아남자. 어느 수련원 정문에 도착한 후, 참석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구석이 보이지만 그런대로 필요한 건 모두 갖춘 공간. 참석자들이 하나 둘 도착하는 가운데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혼자 있고 싶어.
인파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그늘진 숲 속에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건물 안에서 누군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캠프가 시작되고, 어느 신혼부부가 오지를 탐험하며 봉사 활동을 한 이야기, 어느 치과 의사가 600명의 어린이를 후원하는 이야기, 어느 보육원의 원장이 아이들의 멘토가 되어줄 청년을 찾는 등 헌신적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두 좋은 말이었지만, 나는 쉬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해가 비껴간 자리를 찾아 그늘이 드리워 있으면 그곳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자 붉은 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야외에서 식을 올리기 참 좋은 날씨였을 텐데,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눈부시게 빛났을 텐데. 감은 눈 사이로 생각이 피어오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한 햇빛이 식장 내로 새어 들어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언니는 결혼식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로 했다. 아빠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축가를 불러 주기로 약속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을 내가 저버렸다. 슬픔에 잠기기엔 너무 밝은 날이었고, 너무 밝은 날이라서 나는 자꾸만 울었다.
캠프가 끝났다. 나는 숨만 쉬고 살아남았을까. 아니, 그 사이 마음은 더 공허해졌다. 캠프는 도피처로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량한 이들의 이야기 또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애도했다.
Ep 2. 도망친 곳에서
캠프에서 여러 사람과 한 조가 되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의견을 나누고 대화를 하며 함께 주어진 미션을 빌드업해 나가기 참 좋았다. 그런데 캠프가 끝나자 돌아간 일상에서 우리는 다시 연결되기 어려웠다. 모두가 바빴으리라. 분주했으리라. 하지만 왜 계속 그 미션이 생각날까.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할 몸의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왜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지.
한 친구가 안부 연락을 해왔다. 지난 주말은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이었다. 캠프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나 그날을 혼자 보낼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어. 그런데 내가 동쪽으로 도망칠까 봐 이번에는 서쪽 깊은 곳에 나를 가둬 버렸지. 오랫동안 기부한 단체가 있는데 그곳에 가서 강의도 듣고, 사람들도 만났어.‘
친구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스리랑카 이야기를 들었어. 청각 장애인들과 지체 장애인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이동수단이 필요하대. 그래서 모금 활동을 해보자는 말이 나왔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그 대화가 시작이었다. 우리는 어설프지만 실행에 나섰다. 6월 한 달간 같이 달리자. 우리가 달리고 걸은 거리만큼 돈을 기부해서, 아이들을 위한 모금을 전개하자. 홍보물을 만들어 SNS에 올리고 주변에 같이 달려 달라고 이야기하자.
인천, 서울, 홍성, 제주, 강릉, 전주.. 온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금 활동에 동참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참여자들의 인증 알람이 울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 달릴까. 이 일이 그들에게 희망이 되는 걸까. 지구 반대편 장애인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의 가치가 그들을 달리게 할만큼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 걸까. 내 시간과 마음, 돈과 에너지를 쓸 만큼?
아침에 눈을 뜨면 감정이 올라오기 전에 운동화 끈을 매었다. 저녁이 되어 슬픔이 덮쳐오기 전, 문밖을 나섰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나부터 달려야 했다. 쓰러지는 몸을 이끌어 달리기에 나섰다. 매일 아침과 밤 동네를 크게 달리며 나는 울었다. 지칠 때까지 나를 한계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모금 활동의 마지막 날은 짐짓 마음이 달라졌다. 여태껏 바라왔던 기도들, 모금 활동 소식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 이 달리기가 끝나고 나면 내가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것과 전혀 다른 기도가 나왔다. 그날은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이겨낸 듯한 성취감이 감돌았다. 마음에 아주 작은 희망이 움텄다.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던 나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예스를 외쳤다. 잘했다, 수고했다, 스스로에게 말하며, 죽고 싶었던 날들에 안녕을 고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을 살해하려는 뿌리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힘과 무의식 속에서 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낸다. 나를 붙잡아줄 손은 나 자신의 손일 텐데, 그 귀한 손에 칼을 들고 뒷걸음질 치는 저 자신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이 위협을 가한다. 무섭더라. 내 감정이 나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자학하고 자해하는 무의식의 힘이 매일 밤 내 곁을 찾아왔다.
그런데 모금 활동을 마치고 나니 놀랍게도 마음이 나아졌다. 서해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 고통의 순간을 모두 지나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망설임과 물러남 없이 여기까지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의 막이 마무리됩니다. 당신의 은혜와 나의 수고에 감사합니다.
모금 활동은 6월 한 달간 진행됐지만 7월까지 기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나 프로젝트 말미에 나타나 100만 원의 거금을 일시 후원해 주었다. 내 생애 가장 어두웠던 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던 모금 활동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지고, 울며 지새운 나의 밤들이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기부 현장에 동행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됐다. 지체없이 함께 하겠다고 의사를 전달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시작과 마무리를 모두 할 수 있다면 더욱 의미 있으리라. 그렇게 9월 23일 인천을 출발해 물방울 모양의 나라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비행기만 여덟시간, 다시 심야 버스를 타고 여덟시간. 편도 20시간을 달려오니 모금액으로 구매한 툭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호단체에서 지은 학교를 방문하는 스케줄 사이로 우리는 늘 툭툭을 타고 다녔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구매한 툭툭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현장의 분위기, 이국임에도 낯설지 않은 환경 속에서 슬픔은 자리를 비우고 오직 즐거움만이 꽃처럼 피어났다. 아이들과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야자수 나무와 라군을 지나 숙소에 도착했고, 땀에 젖은 옷을 손빨래해 숙소에 걸어 놓았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Ep 3. 나는 알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을 때, 다가올 모든 책망과 비난을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 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했다. 남들이 던지는 돌도 있었지만, 내 손에 든 채찍이 나를 내리칠 때마다, 나만 아는 급소를 찌르고 또 찌를 때마다 버티고 견뎌야 했다.
모금 활동을 시작하며 아무 힘도 없는데 내가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무얼 하는지, 왜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매일 밤 내 영혼을 갉아먹으러 오는 책망 앞에서 스스로 서 있기 위해 계속 달렸다.
달리기는 미련을 흘려보내고, 책임감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감정의 무게를 달고 달리는 밤이 길어질수록 그 무게를 견뎌낼 힘이 자라났다. 책망의 무게는 동일했지만, 몸의 체력이 커지니 마음도 덩달아 강해졌다.
달리면서 깨닫기도 했다. 이 모금 활동이 잘 마무리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아닌 그 누가 시작했어도 이 일은 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 먼 타국에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고, 선생님들이 기도하고 있으니, 그저 누군가 이들의 기도와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나서기만 한다면, 일은 모두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이 일이 저보다 큽니다. 이 일이 가진 에너지가 저를 이끌고 있어요. 저는 그저 이루어가는 사람일 뿐, 이미 이루어지기로 모두 예정된 일 같아요.
스웨덴의 동화 삐삐를 만든 작가 린드그렌은 이렇게 말했다.
-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사랑해 줘야죠. 그래도 문제를 일으키면 또 사랑해 주고.
그래도 문제를 일으키면 더 사랑해 줘야죠. 그 과정을 거쳐야만 아이들은 온전한 성인이 됩니다.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비판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성인으로요."
결혼에 실패하고 신뢰를 저버린 날, 자책과 책망으로 얼룩진 날. 나는 죄책감을 들고 숲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나 숨게만 둘 수 없어서, 달리기를 선택했고, 여기까지 달려 왔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이들에게 진정어린 용서를 구한다. 상대의 안녕을 바라며 감히 행복과 사랑을 기원한다. 부디 이 글이 너무 무겁고 당신을 지치게 하지 않았기를. 부족한 내가 자기 자신을 포용하기 위해 이만큼 애썼구나 그 정도로 이해해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