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직장-결혼 등 정상 루트에 순응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집단으로부터 소속감보다 이질감을 느꼈고 어딜가도 어중간한 위치에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공부나 운동 등 잘 하는 것도 없었고, 관계 맺기도 실패했거든요.
포용보다 배제의 기억만 멤돌았던 집단으로부터 저는 실패한 것일까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책과 유튜브 동기부여 영상을 봅니다. 소위 유명 셀럽들은 ‘그런 인생마저도 사랑하라’ 라고 하는데, 이미 그들은 부와 명예를 거머쥔 지 오래랍니다. 저에겐 와닿지 않고 도리어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가 믿었습니다. 스스로 묻고 노력해도 한계를 절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계는 코로나를 비롯한 기후위기 문제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이 노력해도 기후위기는 극심해졌고 부의 양극화는 코로나 이후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좀비 영화를 보지 못합니다. 영화 속 장면을 상상할 때면 늘 최악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설령 그 좀비를 누군가 나서서 퇴치한다면? 만약 좀비 사태가 전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는 어떨까요. 영화는 항상 주인공과 주인공 가족이 흩어지다 좀비를 퇴치하고 다시 만나는 클리셰로 진행되곤 하는데,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만약에 라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저는 극장에 나와서도 소중한 이들의 안위를 걱정 한답니다.
그럼에도 실제 좀비사태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만약 좀비들이 들이닥치면 생존자들을 어디에 대피시키지? 한남동 유엔 빌리지? 대강당? 편의점? 도서관? 학교?? 만약 동물들은 어떻게 해야하지? 식사는? 좀비들이 밀려들면 어떻게 막지?? 이런 망상(?)을 하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소중한 이들이 오랫동안 잘 지내고 별 탈 없이 살아갔으면 좋겠단 마음이 자꾸 멤돌아서 그랬나봅니다. 오지랖이 참 많아서 탈입니다.
좀비 영화까진 아니어도 재난 상황이 연이어 닥치는 시대를 지나오고 있습니다. 이윤에 눈 멀어 산업 재해가 벌어진 일터, 기후위기로 인해 사회적 재난으로 번진 일들을 뉴스로 접하면 오늘날 수 많은 인간/비인간 동물들의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여성혐오 범죄, 기후위기로 인해 침수된 집, 실종자 시신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구르는 이들의 절규, 가해자 무죄 판결, 희생자를 향한 혐오 발언이 판치는 모습이 이어질 때마다 저는 무력감이 솟곤 합니다.
그럴 때 나는 뭘 할 수 있나 고민만 하다보니 고민은 고민대로 놔두고 눈 앞에 놓인 일만 처리하다보니 어느샌가 먹고사니즘에 찌든 직장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도 이런 재난의 공포가 스밀 거라곤 상상도 못하다가 지금은 공포에 경각심을 갖게 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중고서점에서 일합니다. 햇수로 1년 10개월 째 접어들고 있네요. 곧 2년이란 시간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일에 적응하느라 애쓰다, 익숙해지기를 반복할수록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저의 일터는 강남과 가깝습니다. 2년 전 침수피해로 도로가 전부 잠긴 곳이지요. 강남구 지대가 고저차가 심해 여름 폭우면 금새 도로가 잠길 만큼 침수 피해가 심각한 곳이기도 합니다.
일터도 반지하에 위치해 있는데 침수피해가 우리에게 들이닥치면 어쩌나 걱정이 드는데요. 얼마 전 저의 고향에 침수 피해가 있었는데 저희 집 근처 도로가 물에 잠긴 사진을 보았습니다. 올 해 여름처럼 폭염과 불규칙한 폭우가 지속된다면 내가 일하는 곳 역시 물에 잠길 것이란 두려움이 솟곤 합니다.
2022년 강남, 2023년 오송 그리고 올해는 부산. 해마다 침수처럼 불안이 밀려옵니다. 제게는 먼 일 처럼 느껴진 참사가 스멀스멀 가까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일하는 곳은 계단이 경사지고 폭이 좁은데 만약 침수가 일어나면 일터의 집기들이 떠밀려 입구를 막게되고 탈출조차 어려워지지 않을까 불안의 시나리오를 재생합니다.
만약 그 대상이 동물이라면, 혹은 장애인이나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이라면 침수에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하지만 세상은 효용성을 쫓습니다. 그저 살기만 하면 된다며 빛 제대로 들지 않는 반지하에 세를 둡니다. 시에서 물막이를 설치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어도 집값 떨어지는 게 싫어 반대한답니다. 사람을 돈으로 보는 시선이 세상을 뒤덮어 기후위기를 가려버립니다. 무력감이 서서히 스미다 먹고사니즘에 천착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효용성이란 이름으로부터 가려진 이들을 생각합니다. 누가 더 많이 벌고 누가 더 많이 쓰고 누가 더 성과를 거두느냐를 외치는 세상 뒤엔 실패와 좌절을 겪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노래가사와 세상의 가르침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리는 이들 뒤로 상대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에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조차 알 리 없습니다. 숨은 가빠져오는데 돌리고 싶어도 그늘이 없으니까요.
오늘도 저는 이른아침 강남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에 겨우 몸을 우겨넣고 지냅니다. 가쁜 숨을 내쉬고 겨우 지하철을 잡아타지만 한 편으론 출근부터 퇴근하는 내내 구경꾼의 위치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직 부족하니까, 모르니까라는 말에 도망치고 조금씩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해도 혼자란 생각에 지쳐갈 때, 일상에 균열을 내고 헤집고 창작자와 활동가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몰랐던 것을 알려주고 세상에 균열을 내는 이들이자 부당한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살자고, 문제를 차차 해결해 세상을 바꿔나가자고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웠는데 실은 나만 그러한 게 아니라는 동질감에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물음표를 지니고 삽니다. 물음표 기호를 자세히 보면 물음표(“?”) 끄트머리에 갈고리가 있고 아래 온점이 있습니다. 물음표가 사물이라면 마치 고리같단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물음표를 걸어 타래를 엮어 힘껏 타래를 퍼올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풀리지 않는 물음을 이어나가 비로소 문장을 맺는 온점(“.”) 에 다다르기까지, 이들의 집요함은 어떤 풍파에도 깎여 반듯해진 몽돌처럼 단단합니다.
흔들리는 순간이 와도 홀로 다독이라고 아니 혼자가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의 냉소가 싫습니다. 개인화를 쫓게하는 현대 사회에서 돌고돌아 혼자라는 온점을 찍게 만들어 물음을 끊어버리는데, 활동가들은 균열을 냅니다. 저는 그들의 존재에 물음이 이어져 온점에 다다르는 여정을 통과해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 여정이 길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음에서 온점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지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