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따숩다고 하기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청명하고 푸른 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그 햇볕들을 가려주는 큰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골목으로 틀어야 했습니다. 틀자마자 짙은 회색 전봇대 밑에 멀쩡해 보이는 빈티지 빨간색 탁상시계가 놓여있더군요. 나는 그 시계를 살펴보다가 나의 카키색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얼마 남지 않은 약속 시간에 그 빨간색 시계를 뒤로한 채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높은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의 파란 티셔츠의 곳곳은 짙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더 짙어지기 전에 검은색 원피스 위로 커다란 꽃들이 비정형적으로 박혀있는 랩 원피스를 입고 서 있는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더운 날씨와 힘듦을 핑계로 투덜거리며 당신의 팔을 꽉 쥐었다가 낮에 본 빨간색 시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 시계가 궁금하다는 듯이 나에게 되물었지만 나는 당신이 말과 달리 얼른 시원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원하거나 다른 것을 떠올릴 때 입술을 앞으로 조금 내밀고 가로로 찢는 것을 반복하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시원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나의 몸 가장 뜨거운 곳으로 파고들어 여기저기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쳐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그때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안 돌아다녀도 돼?"
"응. 괜찮아 나도 카페에서 할 일 하려고."
당신은 무언가 신경 쓰인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썹을 띄워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린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공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당연하다는 듯 당신은 주문하러,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자주 마시는 음료를 알았고 가끔 변덕스럽게 입맛이 변할 때조차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습니다. 그날도 갈증이 심했던 나는 상큼한 에이드가 먹고 싶었고 언제나처럼 당신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유자 히비스커스 에이드를 손에 들고 자리로 돌아왔죠. 나는 놀랍다는 제스처를 잊지 않고 꼭 해주었습니다. 우리만의 방식이었으니까요. 자리에 앉은 당신은 아까 그 빨간색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음. 그러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길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보는데 신기하게 그 빈티지 시계는 내 해마를 파고들었어. 단지 색깔이 문제가 아니야. 분명 이틀 전엔 강렬한 색깔의 양말이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처럼 커다란 교차로 횡단보도 중간에 떨어져 있는 걸 봤는데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도 그 양말 색이 레몬색이었는지 연두색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빨간색 시계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너와 대화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시계 초침이 보라색이었으며 숫자마다 앞에 연두색 마크가 찍혀있던 거까지 세세하게 기억이 난다는 거야.“
당신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 고개를 갸우뚱했죠.
“시계가 세세하게 기억나는 게 꼭 너를 처음 봤을 때 같아. 내가 너를 처음 본 날 너는 초록색 바탕에 흰색 작은 땡땡이들이 박힌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하얀색 리본이 달린 플랫슈즈를 신었잖아. 머리는 질끈 묶은 단발이었고. 귀걸이는 작은 링 귀걸이였어. 그리고 그 생각도 내 해마를 파고들어서 아까 그 감각과 맞닿은 거지. 너한테 시계를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요리조리 살펴보다 약속 시간이 늦을까 봐 급하게 왔어. 색깔과 상관없이 너무 강렬했거든. 그 존재 자체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당신이 내 말을 이해했다고 지금도 확실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날 우린 꿉꿉하고 불쾌한 날씨 속에서도 마음을 주고 받았으며 끝끝내 헤어지기 아쉬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그 시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낮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보라색 초침은 전봇대 앞 횡단보도에 산산조각이 난 빨간색 시계의 파편은 그 주변으로 튀어있었습니다. 놀란 나는 보라색 초침과 빨간색 파편들을 집어 들고 전봇대 뒤 잔디밭에 모아뒀습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그것들이 당신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그런 걸까요. 반가운 마음에 다시 갔는데 망치와 같은 것으로 맞아 산산조각이 난 모습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 그런 걸까요. 손으로 잔디를 헤집어 땅을 파서 그것들을 묻어줬습니다. 절대 썩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