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자냥입니다.
'끝없는 잔향속에서 우리는' 이라는 밴드에서 '잔향'을 따왔는데요. 친구들이 발음식으로 자냥이라 불러주어 자냥이 됐습니다. 요즘엔 '전자양' 이라는 밴드도 좋아져서 '자양'으로 바꿔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허겅~
여러분은 무언가에 지독하게 쫓기며 살아 본 적 있나요? 저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부에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지금은 얌전히 재판을 받고 있고, 곧 감옥에 가요.
2023년 4월 27일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 저는 머리카락과 눈썹을 밀고, 미리 준비해 둔 약간의 현금을 챙겨서 아주 요란하고 수상하게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 아주아주 멀리 떠나자 다짐하며. 언젠가 강해져서 이 나라에 복수하자 칼을 갈며.
당일 오전에 나눴던 친구와의 전화가 기억납니다.
"내일 해운대 홈 갈래?"
"아 미안 나 오늘 새벽에 떠날 거라 좀 힘들 거 같네"
"그래? 멀리 가?"
"응" "괜찮은 거 맞지?"
"그럼! 또 연락할게 다음에 맛있는 거 먹자"
분명 한 2주 정도 계획한 탈영이었지만 어느새 300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자수를 했습니다. 이 글은 저의 여행기입니다.
전 세계 90%의 병역거부자들은 모두 한국에 수감 되어 있습니다, 병역거부자들 중에는 난민이 되어서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신 분들도 계십니다. 난민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테러의 위험을 피해 망명을 떠난 사람들을 지칭하지만 국제법에 따르면 정치적 의견 등의 이유로 박해가 받을 우려가 있어 자국의 보호를 원치 않는 자를 포함합니다. (종교, 민족, 인종, 빈곤, 자연재해 등도 포함합니다)
저도 망명을 고민했습니다. 일단 한국을 떠나기만 한다면 난민 신청을 할 수 있거든요. 이탈한 직후 4일간은 여권이 정지 되지 않았기에 바로 떠난다면 떠날 수 있었지만 계속 망설이다 여권이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밀항을 고민했습니다. 위조 여권으로 공항 보안을 뚫는 거 보단 항구의 짐짝이 되는 길이 더 쉬워 보였습니다. 어찌저찌 대만이나 북한까지 밀항할 수 있는 루트를 수소문 하긴 했지만 결국엔 한국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제가 겁이 엄청 많았던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도망치며 숨어사는 걸 은근히 즐기고 있었거든요.
현금만 사용해야 했고, 전화번호도 물론 유심부터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인터넷이 안되니 지도도 손으로 직접 약도를 그려야 했고, CCTV가 적은 길만 골라 다니고, 종종 히치하이킹을 했습니다. 공공장소에선 한여름에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했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건 당연했습니다.
조금 각박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습니다. 손바닥에 전화번호부를 만들어 공중전화로 친구들에게 안부를 주고받았고, 제가 그린 지도들은 아주 사랑스러운 기념품으로 남았습니다. 전기 사용을 줄이는 건 환경에 도움이 됐고, 시장에서 현금으로 구매한 야채들은 농부들과 지역민들에게 온전히 돌아갔습니다. 유서도 출력하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고집이라니. 흔치 않은 기회였죠. 언젠가 정부나 기업의 영향력 밖에서 살아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습니다.
탈영한 초반에는 한 지역에 2~3일 정도만 머무르다 다시 이동하며 전국을 다녔습니다. 주로 친구들 집에서 신세를 졌는데요, 친구들은 저를 '택배'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대전의 친구 집에서 광주의 친구 집으로 이동할 때 친구들이 '택배 보냈어. 내일 두 시 도착예정' 라는 식의 은어를 주고 받았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오면 '아이고 택배 왔네~' 하고 반가워 해줬습니다. 택배를 기다리는 마음 만큼 저를 기다렸을까요. 그 마음이 저는 너무 귀엽고 좋더라고요.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선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시골 생활은 저에게 유토피아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곳엔 젊은 일손이 늘 필요 했고, 어르신들은 임금을 현금으로만 주셨습니다. 게다가 무려 시급 1만원! 저는 이 곳에서 번 돈으로 악기와 노트북을 사서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밭일도 하고, 매일 계곡에서 수영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랑 밤새 술도 마시며 그냥 정말이지 아주 놀았습니다. 내 인생에 이렇게나 잘 논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병역법에 따르면 만 38세가 되면 입영의무가 해제 되기 때문에 대략 15년 정도만 숨어있으면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됐습니다. "어? 할만한데? 이 정도면 30년은 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결국 1년 만에 자수해버렸지만 말이죠.
저를 괴롭게 했던 건 계속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점점 정이 들어가는데 계속 제 본명과 다른 이름으로 저를 알고 계셔야 했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만든다고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릴까 하는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놨습니다. 저 사실 쫓기고 있다고. 그래서 신분증이 없다고. 그런데 웬걸!! 다들 쉽게 이해해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오래 전 부터 빨치산 분들이 숨어살던 야산이었던 겁니다. 다들 자기들도 학생 때 정부에 쫓겨 다닌 적 있지 않냐며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 마을이 너무 좋네요.
이렇게 저를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힘들고 먼 길 여기까지 왔네요.
제 상황을 듣고 흔쾌히 집을 내어 준 친구들, 자기 명의로 전화번호 개통해 준 친구, 대중교통은 위험하다며 자기 차로 5시간을 내리 달려준 친구, 아무것도 묻지 않는 불법 병원을 소개해 준 친구, 공범이 되겠다 한 친구들, 너 신고해서 포상금 타야겠다고 농담하는 친구들 까지... 다정한 인연들의 사랑과 함께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갑자기 자수를 하게 된 건 수감생활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신분 없이 사는 건 언제든 할 수 있겠지만 수감생활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감옥 안에도 나름의 공동체가 있고 지혜가 있더군요. 동시에 감옥 폐지 운동과 병역거부 운동에 관심이 커지기도 했고요. 저는 책보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 보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감옥에 대해서 잘 알아야 감옥이 가지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겠죠. 그리고 어차피 징역형은 이미 확정된 일이었고요.
제가 이번 여행으로 깨달은 건 정부와 기업이 너무 과도하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생존에 꼭 필요한 치안유지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건 분명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치안유지가 아닌 감시와 단속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 거죠.
도시에 살 적 가끔 내 일상과 사생활 모두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지문날인 거부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지문은 모두 정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회원 가입을 하면 내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주민등록번호까지 싹싹 털어가는 거도 모자라 구글이니 카카오니 온갖 기업들과 연동하라고 난리입니다. 어떻게 추적하는지 모를 내 관심사만 쏙쏙 골라 광고로 띄워주고, 별의 별 세금은 다 때어가면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하나 늘지 않고 윤석열 사무실에 사우나, 드레스룸 이런 거나 생기더군요.
정부의 과도한 통제, 감시, 단속들 속에 두 발 뻗고 편히 주무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각박해지기만 합니다. 또한 난민이나 불법체류자, 출생 미신고자, 성 노동자, 약물 사용자 등 다양한 위치의 불법 존재들에게는 이게 얼마나 더 폭력적으로 다가올지 감히 가늠조차 안되네요.
권리도 의무도 복지도 제도도 그 어느것도 닿지 않는 외로운 곳이 있습니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말도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지요. 국민의 자격을 묻는다는 건 1등 시민과 2등 시민이라는 차별적인 구조적 계급을 양산하고,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어 비국민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로 하여금 난민으로서의 삶에 노출되게 만듭니다.
저는 지금도 현금만 사용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본인인증을 하지 않습니다. 세금 신고는 물론 현금영수증도 하지 않고, 정부에서 하는 복지나 기업의 초특가 이벤트엔 눈꼽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습니다. 짝꿍이랑도 여전히 텔레그램으로만 연락을 주고 받고 있고요. 손해를 좀 보더라도 야금야금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소소한 실천들. 이런 게 저는 재밌습니다. 저에게 맞는 삶을 찾은 거 같아요.
저는 이제 2차 공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2차에서 마무리 된다면 아마 빠르면 11월쯤 선고가 나와 감옥에 가는 걸로 예상하고 있어요. 제 글이 전해지는 걸 제가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주제라 최대한 가볍고 재밌게 쓰려고 했는데 잘 전달 됐을지 모르겠네요. 놀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암튼 제가 다 경찰과 법원에 자수한 내용들이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네요.
뿌리를 두지 않고 걸었습니다. 비 오는 날엔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비가 온 다음날엔 뒷산에 자라난 야생버섯을 관찰하는 걸 즐겼습니다. 고라니 울음소리에 피식하지 않는 어른은 언제 되려나 하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네요.
다들 각자의 삶을 지키려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도움이 되었어요.
주류 시스템과 영원히 대립해서 싸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너무나도 무거운 삶이지만 함께라서 외롭지 않습니다.
출소해서 다시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탈하시고, 재밌게 노시고, 다치지 마시고,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