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님, 평화해요! 오늘의 늘보 벗님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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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보와의 인연은 마치 영화 클리셰 같았습니다. 작은 부딪힘이 거대한 인연을 만들었지요. 우리는 언젠가 각자의 협동조합을 품고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조합 운영에 허덕이느라 한참 그를 잊고 있었어요. 몇 년 뒤 뜬금없는 장소에서 작고 귀여운 사람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바로 늘보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웃음을 가진 그였기에 다행히 금방 기억해냈습니다. 알고보니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 여기저기 많았더군요. 돌고 돌아 드디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분명 오래 깊어질 것이에요.
늘보의 팔에는 적어도 10개 이상의 팔찌가 있습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돌, 구슬, 나무가 부딪히며 재미난 소리가 납니다. 저는 그 팔을 보며 그의 여행길을 추측합니다. 하나하나 다른 사연을 상상할 수 있을만큼 (실제로 그런 사연이 있을만큼) 다양합니다. 샛길 하나 놓치지 않는 발걸음과 찬란한 풍경을 찾아내는 눈길, 분명 저 팔찌만큼이나 환하게 아름다울 겁니다.
늘보는 균형이 깨져야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 여행자입니다. 어느 경계선이든 넘나듭니다. 엔트바진(Antevasin)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릅니다. 그는 봄의 끝자락에 잠시 한국에 돌아와 일을 끝내고 곧바로 다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여행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분명 이 글을 보내줄 때까지만 해도 메일링이 끝난 이후에 출발한다고 한 것 같은데, 지금은 또 벌써 영국이랍니다. 어이없지만서도 참 ‘늘보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받님도 이 기행문을 읽으면 공원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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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받님! 저는 늘보라고 합니다. 늘보가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나무늘보가 가장 먼저 생각나시겠죠? 맞아요. 그 늘보 맞습니다! 제가 늘보를 닮아 친구들이 종종 그렇게 불렀어요. 그런데 나무늘보는 엄청 느린 삶의 속도로 잘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와는 정반대의 동물이랍니다. 그럼에도 제가 늘보라는 별명을 쓰는 이유는, 불리는 이름만큼은 늘보처럼 여유로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늘 보람차게 살자는 의미를 담아 지금까지 늘보로 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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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과 나눌 이야기는 저, 늘보의 배낭여행이에요. 사실 정말 여행에 일가견있는 분들이 많아 주름이 잡아지지도 않지만, 저는 2018년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을 오가는 장기 배낭여행자 입니다. 한번 가면 비행기 바꿔서 안 오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가는 인생을 살았던 덕에 오랜만에 연락이 오면 “너 한국이야?” 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게 되었어요. 가장 길었던 여행은 7개월, 가장 짧았던 건 3개월 조금 넘게였던 것 같아요.
저는 배낭을 메고 영국과 유럽의 시골들을 여행합니다. WWOOF(이하 우프)는 유기농가에서 일하고 살면서 주식을 제공받는 노동교환의 형태에요. 사실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저희 학교가 우프 코리아의 호스트였어요. 그때부터 우프를 통해 여행하는 전세계의 여행자들을 만나며 친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여행을 꿈꾸게 되었답니다. 우프는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로 대부분 농사일이지만, 비슷한 개념으로 workaway, helpx 같은 것도 있어요. 저는 자연 그리고 사람과 가까이 사는 삶을 좋아해 우프와 같은 여행 방식을 선택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적은 돈으로 오래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우프를 하면서 50명이 넘는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도 해봤고, 영국국제개발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한국어 프로모션도 하고 텃밭을 돌보는 일도 했어요. 한번은 런던 근처에서 어떤 아저씨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며 2주를 지낸 적도 있고요. 우프는 아니지만 워크어웨이를 할땐 독일에서 말과 라마, 강아지를 돌보며 살았고,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애들을 돌보는 일도 해봤어요.
모든 곳이 다 좋았다고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을 만났습니다. 영국의 땅끝 마을이라고 불리는 서쪽 가장 끝, 콘월에 있는 보사번입니다. 지금까지 보사번은 3번을 다녀왔어요. 콘월이 겨울에도 너무 아름답기도 했고, 첫 번째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기도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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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사번은 커뮤니티농장이에요. 저를 비롯한 우퍼들은 농장에 있는 팜 하우스에 살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근처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농장의 역할 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어요. 미취업자를 대상으로 요리 교육이나 퍼머컬쳐, 농사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이미 지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더욱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 계속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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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하루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따라갑니다. 아직은 조금 어두컴컴할 때 약 300마리의 닭들이 넓은 들판에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문을 열어줍니다. 계란을 여기저기서 보물찾기 마냥 한바탕 찾고 나면 계란을 잘 씻고 선별하여 농장에서 운영하는 가게로 가져갑니다. 매일매일 신선한 계란을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아직 따뜻한 계란을 건네 주는 것만큼 보람찬 일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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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을 지나면 4개의 작은 비닐하우스와 끝이 안 보이는 밭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4계절 내내 다양한 작물들이 계획되어 심겨 있습니다. 꽤 넓어서 처음 오면 뭐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인데, 나름 보사번 경력자라 앞장서서 친구들을 데려가 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하는 게 정말 재밌었어요. 어느 날은 한 이탈리아 친구가 자신 있게 어떤 작물을 찾으러 갔다가, 정말 자신 있게 다른 작물을 가져와서 다 같이 크게 웃은 적도 있습니다. 일을 하다 실수해도, 가끔 일이 너무 힘들어도, 항상 친구들과 함께이다 보니 같이 찡찡거리고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결국 그 일을 끝낼 수 있었어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로컬 발룬티어들이 오시는 북적북적한 날입니다. 특히 화요일에 오시는 분들은 제가 좋아하던 분들이었어요. 일명 Tuesday boyz라고 불리는 할아버지 3인방입니다. 이분들은 제가 영국사람이 아닌 점을 이용해 가끔 이상한 영국식 장난을 치면서 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장난끼 많은 이 할아버지들은 저에게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친구같은 존재였어요. 덕분에 영국의 문화나 사회이슈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요. 특히 제가 만든 한국음식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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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찾아와 닭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다시 문을 닫아주러 닭장으로 향합니다.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닭장에 가는 길은 어둠과 빛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라 길을 멈추고 잠시 감상을 하게 됩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닭들이 모두 들어갔는지 확인하면, 저희의 하루일과도 끝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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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루 종일 하는 것이 정말 고된 일이라, 일이 끝나면 각자의 방식으로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냅니다.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 카드게임을 하거나, 누구는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요. 저는 수요일마다 근처 동네에 요가수업을 갔고, 요가가 끝나면 친구들과 펍에도 종종 갔습니다. 이 동네는 정말 작아서 이렇게 몇달을 있으니 금방 동네에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순간들이 저를 계속 그립게 하는 것 같아요. 비록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정말 짧은 시간을 있으면서도 마치 나의 동네와 같은 편안함을 주는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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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사번과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사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만큼 헤어지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근데 심지어 지구 정반대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고, 어쩌면 인생에서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함께 거실에서 뒹굴 거리는 이 사소한 순간이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항상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과의 인연 그리고 순간들을 잘 기록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만의 작은 여행기록 프로젝트가 탄생했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 저는 친구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아무 말이나 적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물어보지 않아요. 사실 사진으로 찍으면 파파고 이미지 번역도 되는 시대에 마음먹으면 다 찾을 수 있지만, 언젠가 그 언어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면 그게 몇 년 전의 편지이든, 그때 비로소 무슨 뜻인지 물어봅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에스토니아, 체코, 아이슬란드 등 해석을 하지 못 한 편지가 있기도 합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제가 어쩔 수 없이 계속 여행을 해야겠네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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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6월의 마지막 날이죠? 사실 저를 초대해 준 자야에게 이 글을 6월 30일에 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오늘이 제가 잠깐 몸담고 있는 곳의 계약 종료일이거든요. 단기직 인생을 반복하고 있는 저에게는 계약종료일이 마치 해방일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4일 뒤 다음 주 목요일, 두 달간의 짧은 늘보의 배낭여행을 다시 떠납니다. 이번에도 마음의 고향인 영국의 시골을 다녀올 예정이고, 저를 기다려 주는 세계 곳곳의 또 다른 늘보들을 만나러 떠날 거예요.
9월 한국에 돌아오면 이제 저는 어떻게 될까요? 일과 여행을 오가는 삶을 살고 있어 가끔 불안하기도 하지만, 저는 언제나 그때의 길이 생긴다고 믿고 있고 그래왔습니다. 언제나 제 별칭인 늘보를 기억하며 늘 보람차고, 늘보같이 여유로운 삶을 계속 살아가고 싶습니다. 늘보가 늘보처럼 살고 있는지, 한국에 돌아는 오는 건지, 소식이 궁금하시다면 제 블로그에 놀러 와주세요. 종종 늘보의 소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부디 해외나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방식으로 여러분만의 늘보의 삶을 모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요. 감사합니다! 안녕!
늘보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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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안 갈래요."라고 대답했더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영원히 궁금해했을 것이다.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보물을 거절한 듯한 느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지닌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험에 대해, 미지의 것과 가능성에 대해 "네"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멀고도 가까운』, 리배케 솔닛 中
애정을 담아, 마공과 자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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