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무엇이든 대충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이 능력마저 탁월한 정도는 아니고 얼추 가지긴 했지만요. 아무튼 그 덕에 무엇 하나 특출난 능력 없이도 그럭저럭 잘 살아왔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 재주 하나 붙들고 굶지는 않을 테니, 분명 나쁘지 않은 스탯입니다.
문제는 하필 제가 그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는 분야, 그러니까 특출나야 하는 분야만 족족 골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영상을 만들어서 먹고살고 있는데요. 네, 역시나 그러합니다! 매번 스스로 책정한 예상 작업 시간을 훌쩍 넘겨 끙끙대고요. 신경 써서 작업하면 열심히 한 티만 나고 어째 그닥 멋지지는 않습니다.
이 자질은 정확히 제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우리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걸어 다니는 잡학사전인 데다가 예술에 조예도 깊고요. 그림도 잘 그리고 기계나 컴퓨터도 잘 다룹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말 그대로 제법인 사람이에요.
그런 아빠가 화성을 공부하고, 합창단을 지휘하며 음악을 최고로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훨씬 더 특출난 소질을 보이는 동생이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빠가 느꼈던 무력감과 좌절감을 저는 알 것만 같습니다.
공부를 해야 아는 사람과 그냥 온몸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간극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의 차이보다 큰데요. 춤을 추던 때도, 글을 쓰던 때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지금도. 저는 제가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제법 그럴싸하게 둘러댄 결과물이 죽도록 구려보이는 안목 정도는 갖춘 게 대체로 저를 더 힘들게 합니다.
부단한 노력을 반복하면 최대한의 내가 될 수 있다던 말들이 제게 지침이자 위로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요새는 그다지 위안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엔 분명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특히 뭐랄까요. 번뜩임이 필요한 일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번뜩이는 인간들을 질투나 하면서, 제가 가진 번뜩임은 무엇일지 오랫동안 탐구해 왔고, 지금도 찾고 있는데요. 아직은 보이지 않고요. 앞으로라고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간 이 결핍을 극복하는 방법을 하나 찾았습니다. 얄밉게 번뜩이는 인간들이랑 같이하는 겁니다. 어떤 일들은 악으로 깡으로 혼자 씨름하는 것보다 적합한 사람한테 보내 버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케냐 사람을 인터뷰하겠다고 지금부터 스와힐리어를 공부하는 것보단 전문 통역가를 구하는 방법이 여러모로 더 나은 것처럼요.
예컨대 저는 제각각 다른 빛깔로 번뜩이는 친구들을 알고 있습니다.
다예는 제가 감히 따라 해 볼 수도 없는 따뜻함과 본인을 닮은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졌고, 효비는 정말이지 뛰어난 미감과 손재주를 가졌습니다. 하림은 재빠르게 트렌드를 캐치하고 소화하는 능력과 다양한 언어 구사력을, 승비는 알잘딱깔센 실무 마스터이자 계획의 성패 따위를 미리 알아챌 수 있는 육감을 가졌고, 해원은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과 결정력, 그를 기반으로 한 깔끔한 편집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반짝이는 인간들과 함께 도모하고 있습니다. 무얼 도모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그건 바로바로…!
고작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간단하게 미운 사람을 복잡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작 이야기를 듣기로 했습니다. 이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한 자기반성이고, 버려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기도 합니다.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영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신 날이면 저희 홈페이지나 유튜브 채널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받님 옆집에 사실지도 모르는 아주 평범한 할머니인데요. 아마 사랑하게 되실 겁니다.
우리 엄마아빠는 저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후에야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임산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달이를 만난 후에야 세상에 개가 그렇게 많은 줄을 알았습니다.
지켜봐 주신다면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실 텐데요. 그럼 여러분도 안 보이던 걸 보게 되실지도 몰라요. 어느새 사랑해 버리시기를, 그리하여 귀하의 인생이 성가셔지기를 소망합니다.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