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 가치주
남들이 다 가는 길은 괜스레 가기 싫어집니다.
반골 기질, 삐딱선, 또는 홍대병이나 힙스터병.
다양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이 기질은 제게 꽤나 유서가 깊어요.
어릴 적 만화영화를 볼 때도 속 없이 밝기만 한 주인공 캐릭터들은 왜인지 정이 안 갔어요.
탑블레이드의 카이, 디지몬의 매튜, 드래곤볼의 베지터 같은 주인공의 라이벌 캐릭터들이 대개 저의 최애 캐릭터였는데요.
심지어는 삼국지를 읽을 때도 대부분이 좋아하는 유비의 촉나라,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조조의 위나라보다도 강동의 군벌 집단이었던 오나라의 주유와 손책의 이야기에 가슴이 뛰더라고요.
해외여행을 갈 때 제게 '성공적인 방문 스팟'의 척도 중 하나는 '한국인을 얼마나 적게 만났는지'예요.
아무리 멋진 곳이더라도 이역만리 타지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잔뜩 모인 대표 관광지에 가면 조금은 흥이 깨져버리곤 했죠.
웹페이지 구석 어딘가에서 발견한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상점에 다녀오는 게 제 여행의 기쁨이에요.
서울에서 약속을 잡을 때면 홍대보단 연남동, 연남동보단 연희동을,
이태원보단 후암동을, 건대입구보단 성수동을 남들보다 아주 조금 먼저 발견했단 사실을 늘 자랑삼아요.
물론 지금은 모두 지독한 핫플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죠.
결국 긴 시간을 함께할 업을 정하는 데에도,
타고난 천성인지 혹은 어릴 적 저도 모르는 트리거가 만들어낸 후천적 성향일지 모를
이 어쩔 수 없는 힙스터병이 숟가락을 얹었어요.
인천에 살면서 남들 다 타는 서울 방향 열차에 몸을 구겨 넣고 출근을 하던 어느 아침,
"나는 이렇게 힘든데, 왜 맞은 편 인천행 열차에 탄 사람들은 저렇게 널널하지?" 라는 생각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멀리 가지 말고 인천에서 뭐라도 작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볼까 마음을 먹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7년째 로컬 콘텐츠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지요.
이 일을 이때까지 이어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돌아보면 제 성향에 꽤나 잘 맞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책을 낼 때도, 전시를 열거나, 무언가 새로운 걸 기획할 때마다,
'이런 건 인천에 지금까지 없었는데!' 하고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남들이 안 가는 길 가는 걸 좋아하던 제겐 블루오션투성이인 이 도시 곳곳은 노다지였죠.
받님들은 어떤 취향과 성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들이 삶에 어떻게 묻어나고 있나요?
누군지 모를 정체 모를 사람들의 편지를 받는 이 이상하고 수상한 뉴스레터를 구독하신 걸 보면
어쩌면 받님들 중에도 저와 같은 기질을 지니고 계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종종 콘텐츠 기획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는데요.
수업 초반부에서 제가 거듭 강조하는 건 '어떤 타겟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인지를 명확히 그리고,
그에 맞는 내용과 톤앤매너를 꾸리라는 거예요.
하지만 사실 저는 이 뉴스레터의 타겟에 대해 놀라울 만치 아는 게 없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제가 아는 거라곤 저를 초대한 자야, 그리고 함께 프로젝트를 펼치는 마공이 초대한 이들이 벗으로 참여한다는 점.
아마 마공과 자야의 취향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또는 그들과 결이 잘 맞는 분들이 받님들이겠죠?
거기까지 추리를 마치고 받님들의 상을 조금 더 그려보지만 여전히 안갯속에 있어요.
저 역시도 분명 초대해준 '자야의 지인'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일 테지만,
저와 자야 사이에는 비슷한 면만큼이나 훨씬 다른 결과 취향들이 있거든요.
이 메일링의 받님들에게도 각자가 서로 그 정도의 간극을 가지고 있을 테지요.
대체로 일면식도 없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는 저희가 매일 메일링이라는 한 배에 탄 데에는 여기서 기대치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하길 바라는 공통 분모가 있을 거예요.
번듯한 뉴스레터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매일 메일링의 벗님들 사이에서 '저평가 가치주'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남들 다 가는 길을 가기 싫어했던 저의 어린 마음이 제가 하고 있는 업을 만나게 해주었듯,
크고 유명한 뉴스레터들 읽기도 버거운 시대에 매일 메일링을 구독한 받님들의 선택이 생각치도 않은 기쁨 속으로 받님들, 그리고 저를 이끌어주길 기대합니다.
그게 잠시간의 킬링타임, 위로나 유머, 리빙 포인트. 그 무엇이든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