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시 10분, 다른 요일은 9시 20분이면 16살 청소년들과 마주한다. 새벽에 갑자기 깨져버린 신발장 센서등의 유리 조각을 수습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어도, 2주간 이어진 학부모 면담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도, 수업 준비가 미흡해서 자신감이 떨어져도 피할 수는 없다. 어쨌든 교실을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아이들 앞에 서서 눈을 맞추고 대화하며 시간을보내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연말이 되지도 않았는데 밀려오는 학사일정이 버거울 때가 많다. 당해낼 힘이 부족하다 보니 늦은 퇴근으로 이어진다. 헐레벌떡 잠들고 일어나는 날이 늘어날수록 기상 알람 시간은 당겨진다. 10분 늦출지 말지 고민하다가 대세에 지장 없음을 인정하며 잠드는 요즘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나와 주변인의 처지를 두고 누가 더 힘든지 비교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한번은 친구가 면접을 준비하는 회사의 근무조건을 말하며 힘이 들까 걱정된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별거 아니라는 뉘앙스로 대꾸했다. 재벌 회장이나 가난뱅이나 한끼 굶으면 배고픈 건 매한가지다. 고통은 비교를 통해 더해질 순 있어도 경감될 순 없다.
학교에서 나는 교사이기 위해 애를 쓴다. 본받을 점이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늘 배움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데, 가장 큰 노력은 학생들에게 그래 보이기 위해 ‘척’하는 거다. 어린이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 꿈과 희망은 어린이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인권 같은 거다. 산타는 존재하지 않으며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폭력적이다. 세상이 포장지를 벗기면 드러나는 진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 나이에 어울리는 배려 있는 진실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은 그 무엇보다 배움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질 권리가 있다. 우치다 타츠루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선생님은 훌륭해, 배울 점이 많아”라고 오해(믿음)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꼭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나를 아는 베테랑 교사는 경직된 가면을 쓴 것 같은 내 모습을 두고 염려하기도 하지만, 초보 교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올해 초, 자취를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여러 로망이 있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인테리어, 그러니까 집 곳곳을 나라는 사람의 취향이 묻어나도록 꾸미고 싶었다. 재밌는 상상을 해볼 여지가 많은 복층 구조는 기대를 부추기게 했다. 바랐던 건 많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며칠 전 이사를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휑하다. 학교 여행에서 남은 김부각 더미, 유일한 청소 도구 돌돌이, 좀벌레 퇴치를 위해 구비한 실리콘과 에프킬라, 집들이 선물로 받은 브리타 정도를 제외하면 이사할 때 가져온 짐이 전부다. 꾸미는 건 고사하고 침대와 진열장도 아직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올라갈 일이 별로 없는 복층은 사실상 없는 공간이나 다름 없다.
여느 예비 자취생처럼 시간 날 때 맛있고 건강한 집밥을 차리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나도 진정으로 안락한 해피밀을 즐기고 싶다. 그러나 식욕은 근처 식당에서 차고 넘치게 충족되지만 수면욕을 해결할 곳은 집이 유일하다. 작은 부엌에서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음식을 차려 먹고, 냄새를 완전히 제거할 정도로 깔끔히 뒷정리하기에는 지금 내 생활이 벅차다. 이삿날 뽑아버린 냉장고 코드는 여전히 그대로다. 마음마저 도로 뱉은 것과 같다. 집들이날, 젓가락이 없어서 음식을 손으로 들고 먹어야 했던 친구들은 사람 사는 집이라면 있어야 할 필수 생활용품 목록을 늘어놓았다. 수저, 접시, 컵, 가위와 칼 같은 것들이었다. “사는 데 큰 지장 없다 친구들아”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까지 포기고 어디까지 선택일까.
시간이 참 빨리 간다. 한 해도 절반 지났다.
마음은 벌써 내일모레 서른이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Time, time, time, time, stop, stop, stop
Time, time, time, time, time, time, 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