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는 관계가 사랑에서 빚어진다고 말하는 감독이 있고, 그의 영화에서는 사랑을 말하지 않지만 그 저변에서 일어나는 파랑을 통해 절절한 사랑을 읊조리는 여자가 있다. 저 여자는 사극을 많이 봐서 고풍스러운 말투를 쓴다고 생각하는 남자와 당신은 현대인치고는 품위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붕괴는 사랑과 환원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요.’ 라는 문장은 사랑의 말로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파랑보다는 거센 일격에 가까운 파도 속으로 자신의 몸을 죽은 까마귀처럼 꽁꽁 숨겨버리는 여자는 헤어질 결심을 끝낸듯 하다. 마침내.
나는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는 순간은 어떤 시점을 중심으로 하여 멀고 가까워지는 흐름에 헤어짐을 맞이하는 때라고 생각하는데, 이 믿음은 두 인간 혹은 일 대 다의 인간이 각자의 관계에서 보낸 시간이 단순히 시간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묶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실재하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시간성은 여러 차원 안에서 기억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허상이나 유령으로 치부될 수 없다.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일어난 인과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인 일에서 일어난 감정의 교류는 수만 가지의 변인 요소에 의해 움직이고 일그러지면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절절한 순간을 왜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인지, 감정이나 추억을 곱씹어 보는 건 왜 원초적 본능에 의한 행위인지, 단순히 그것을 박제하거나 전시에 그치는 것은 왜 품위가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작년 여름, 어느 단편영화제의 뒤풀이 자리를 갔다. 그곳에서 지난 미장센단편영화제의 대상이던 <안녕, 부시맨>의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다. 영화제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그 영화를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서도 술상을 두고 그 영화 사이에 오가는 주변의 찬사를 듣고 궁금해졌다. 감사하게도 감독님은 어느 해의 시절을 휩쓸었다는 그 영화를 웹하드에 게시된 링크로 공유해 주셨다.
따분한 여름방학, 시골에 맡겨진 어린 형제는 부시맨 비디오를 보고 산속에서 부시맨 놀이를 한다. 어느 날 동생 은호는 이상한 아저씨를 발견하고 함께 부시맨 놀이를 한다.
시놉시스를 읽은 후에도 영화를 다 본 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대상이었던 <유빈과 건>을 유리할 순 없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깊숙한 곳에 유빈과 건, 두 아이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두 친구. 그들에게 건천은 최고의 집이자 놀이터이나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빈과 건>은 도로건설계획에 차질을 빚는 비자림을 밀어버리려는 사회상이 반영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직관적이고 내밀하게 영화의 겹을 뜯어보면, 숲에 사는 건과 만나기 위해 도시에 사는 유빈이 자꾸 그 아이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유빈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찾아오면 건은 꼭꼭 숨어 버리다가 아이스크림이 녹아서야 모습을 나타낸다. 둘은 서로에게 ‘탈 거야? 사람이야?’라고 묻는 등 숲속을 헤매며 스무고개를 하기도 하고, 곳곳에 피어난 풀꽃을 떼어다 서로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영화는 ‘숲이 아이에게 말을 거네’라는 늙은 무당의 말로 오프닝을 열지만,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보이지 않는 건을 향해 다시올게, 다시올게 라고 숲을 향해 외치는 유빈의 말로 엔딩을 닫는다.
<유빈과 건>이 직관적으로 둘의 이별을 그리는 반면 <안녕, 부시맨>에는 불명확하지만 못 참겠는 정서가 있었다. 못 참는다는 건, 정서적으로 과잉되는 경험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인데 아무래도 안녕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시절을 가두는 수갑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유빈과 건>의 엔딩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전언인 ‘다시 올게'와 <안녕, 부시맨>의 제목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지나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고 계속 들여다보고 찾아오려는 결심처럼 느껴진다. 안녕이라는 수갑, 못 참겠는 정서. 그것들은 왜 내게 약점이 되었을까, 왜 사람과 장소와 삶과 시기와 같은 모든 이별의 순간에 나를 가두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봤더니 쉽게 이별하기를 무서워하는 내면의 어떤 트라우마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짐작한 트리거의 단서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어린 날에 싸움이 잦던 부모님을 말리느라고 현관문에 서 짐을 싼 부모 중 하나를 붙잡고 애원하던 숱한 기억인데 이 기억은 학습된 초자아에 의한 행동이었으므로 이 기억만으로 트라우마의 형성을 논하기에는 단적이다. 다른 하나는 즐겨보던 선택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상기하는 데에서 찾아냈다.
디지몬 어드벤처 1기의 엔딩은 주인공인 태일과 아구몬의 서사에서 안녕을 고하는 것으로 마치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운 그의 저변의 인물들에게 무대를 내어준다. 미나와 이별하기를 무서워하던 그의 디지몬 팔몬은 홀로 디지몬세계를 떠나는 친구들과의 이별장소에 나타나질 않는다. ‘얼굴을 보면 헤어지기 힘들잖아. 그럴 바엔 안 보는 게 나아.'라며 숲에 꽁꽁 숨어버린다. 팔몬의 마스터인 미나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 친구에게 섭섭한 나머지 배에 몸을 싣고도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배가 출발하고, 강 하나를 두고 육지에는 디지몬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웃음으로 안녕한다. 배에 탄 아이들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강을 두고 육지와 배 사이의 간격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 순간 팔몬이 저벅저벅 달려와 미나를 부른다. 미나는 팔면 과 제대로 헤어짐을 마주하고 싶어서 바다 너머로 고개를 뻗고, 팔몬은 지나가는 배를 붙잡으려고 달려간다. 그 순간에 미나의 호크룩스와도 같은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려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하늘 위로 사라져 버리는 모자의 연출은 이 엔딩의 백미이다. 그 쇼트 하나가 삽입됨으로써 이 만화의 엔딩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를 따라가려는 팔몬의 마음과 애착모자가 날아가도 팔몬과의 다시없을 안녕이 더 중요해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눈물짓는 미나. 그 둘의 이별이 선택받은 아이들의 한 시절이라는 서사를 종결짓는다.
같은 맥락으로 <안녕, 부시맨>에서 부시맨은 아이들이 도시로 떠났을 도로 저편으로 몸을 돌리고 하늘을 향해 아이들이 준 부시맨의 화살을 쏘는 쇼트가 있고, <유빈과 건>에서는 정처 없이 건을 찾느라 흔들리는 유빈의 창밖 p.o.v 와 좁은 차창 틈으로 고개를 넣어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다시올게… 다시올게…’를 외치는 쇼트가 있다.
나는 인간이 이별의 순간에 그것이 없던 시간이 되어 유령이나 허상으로 소멸되는 것이라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잊힐 수 없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 그들을 응시하고 바라봐 준다고 믿는다. 잔잔한 응시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이다. 차원의 문을 넘어 누군가의 마음에 살아 있는 일은 처연해지는 정서를 불러오는 동시에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나온 순간을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하는 이에게 이별은 슬프고 아름다운 일격일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