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알려면 무엇부터 관찰해야 할까. 일단은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부터 찾아보자. 타인에게는 몸이 있다.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 눈코입이 달려 있고, 팔다리가 있고, 몸통 속에는 오장 육부가 있을 것이다. 온몸에는 엷은 피부가 덮여 있고, 피부에는 오만가지 신경이 있다. 다섯 가지 감각으로 세상을 지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뇌가 있다.
그는 인간이다. (이것도 공통점이다.) 인간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공유한다. 감정을 느낄 수 있고, 표출할 수 있다. 감정은 크게 희로애락으로 나뉜다.
인간의 외관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이지 복잡하다. 거대한 신경다발과 같다. 어쩌면 그 촘촘한 신경조직처럼 수많은 다발로 연결되어 있는 정보들을 파악해야 되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아는 일 말이다. (이것은 나를 아는 과정과 비슷하다.)
여기서 말하는 ‘알다’의 경험은 단순히 이름 하나, 얼굴 하나 아는 정도를 말하지 않는다. “닿음”의 경험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통 인연 혹은 운명 따위의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과 같은 식의 경험이다. 이것은 매우 오묘한 경험이다.
실제로 만났어도(시간과 공간을 꽤 긴 시간 동안 공유했어도, 살갗이 무한대로 스쳤어도) 이런 식의 오묘한 경험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무수하게 많다. 세상은 홀로그램으로 이뤄져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의 말이 완전히 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떤 게 더 리얼리티에 가까운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기억 속에 유의미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경험은 “닿음”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거나 나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다. (모호한 글자가 되어 흩어진다.) 머릿속에 기억으로는 떠올라도, 감각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다. 마치 다른 세상의 혹은 완전한 타인의 이야기처럼 읽히는 것 같다. 내 이야기 속의 유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는 기억은 서로 닿아지는, 깊이 아는 경험 속에서나 이뤄질 수 있다. 이런 만남이, 진짜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연고도 없이 이뤄진다. 시간의 길이가 앎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깊이 관찰하는 시간은 늘 필요로 한다. 물론 알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하겠지만. 정보의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다. 그의 심연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의 심연을 바라보는 경험을 전제로 한다. 자신의 심연을 바라볼 수 있어야 타인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길이와 앎의 깊이가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누군가를 아는 과정에서 마침내 닿아졌다고 느낄 때 느끼는 기분은 정말 말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하게 긴 시간을 느끼게 만든다. 억겁의 시간이라고 표현해야 될까. 이 표현이 과장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그를 관찰했던 시간보다는 훨씬 더 길고 깊은 시간의 길이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마치 복잡한 신경다발이 질서 있게 짜여있는 모습을 보듯, 어떤 흩어진 조각의 정보들이 퍼즐 조각처럼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서 마
침내 그의 얼굴을, 온도를, 표정을, 손짓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닿았다고 느껴질 때쯤, 아마도 나는 그 지점부터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조각난 이야기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게 된다. 왜라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현상들이, 마치 서로 눈을 맞추듯 이유 있게 흘러가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왜 불행했는지(혹은 왜 행복했는지), 왜 특정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이런 질문들이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쓸모 없이 느껴지는 순간이 결국 오고야 만다.
물론 이런 앎의 과정은 진정으로 타인을 알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일어난다. 이 의지는 늘 의식적으로 발생하지 않지만, 어떤 태도를 통해 형성되는 것 같다.
타인을 안다는 건, 그를 구성하는 영역의 최대한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묘한 일이지만, 타인의 희로애락의 감정 영역을 면밀히 관찰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닿음”의 경험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사실상 감정은 생물학적인 반응과 같은 것인데,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원초적인 정보를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연고 없이도 닿았다고 느껴지는 이들은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희로애락의 영역을 매우 높은 질감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부끄러움(수치심)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최대한의 영역을 타인에게 공유할 수가 있다.
타인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일은, 그의 희로애락의 영역을 보겠다는 의지를 포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모두 마주하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의 것을 보기를 두려워한다. (긍정적인 부분만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에게조차.) 하지만 막상 보고 나면 두려움은 가볍게 사라질 수 있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는 모든 하찮은 감정을 가벼이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 들어 있다.
이해는 정교하게 직조된 세계, 우주를 볼 때 일어나는 현상을 나타낸 단어다. 인간은 외관적으로는 단지 몸뚱어리 하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몸의 현현이 나타나기까지의 직조된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어쩌면 하나의 우주만큼이나 크고 촘촘하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것을 아는 현상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엄청난 일이다.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상대 또한 자신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해는 (렌즈와 같아서) 존재를 선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촘촘하고 정밀하게 연결된 선들을 보여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닿는 데 한계가 있다.
수만 번 피부가 스쳐도, 유령처럼 존재하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상처를 핥는 일보다 더 부질없고 소용없는 관계가 되어버릴 때, 이해의 부재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감각 없는 고통을 느낀다.
단 하루를 본 사람이든, 일 년 혹은 여러 해 동안 봐온 사람이든 상대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게 가능했었다면 아마도 정교한 그의 세계를 볼 수 있었으리라. 왜라는 질문이 들어올 틈도 없이 그와 닿았을 것이다.
그의 표정을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리 없이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수한 감각의 교환 없이도 충만한 경험이 일어날 것이다. 만남은 이런 것이다. 이러해야 한다. 기억 속에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만남은, 서로의 세계 속에 새로운 현상을 직조한다. 이것은 전체를 포괄하는 에너지가 집약된 형체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변주의 형태로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