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봄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색의 다양성에 있지 않을까. 꽃이 곳곳에서 피어나고, 향기가 나한테 다가오고, 길을 가다가 이름 모를 꽃을 바라보며 꽃의 이름에 대해 상상하기도 한다. 노란색은 개나리, 빨간색은 튤립 등 몇 가지 알고 있는 꽃도 별로 없지만 다양한 색은 나를 기분좋게 한다.
과거 학창시절에 미술 시간을 좋아했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여러 색을 섞어서 새로운 색을 만드는 방식이 신기했다. 그리고 붓을 물로 씻어낼 때 색이 물에 배어 나오는 현상도 재미있는 기억이다. 연필로 그리는 소묘 역시 재미있었지만 다양한 색을 함께 덧댄 수채화는 우리들의 시선을 더욱 끌곤 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왼쪽에는 갈색의 서랍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메리골드 색의 맥북이 있다. 듀얼 모니터는 검은색이고, 저 멀리는 여러 권의 책이 있다. 내 시선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각각의 색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색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색을 통해 머릿속에서 상상을 펼치고 판단을 내린다. 색은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의 생각을 다듬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놀랍게도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색은 사실 그 색상이 아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빛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 일부인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
태양빛이 물체에 닿고, 물체가 반사시킨 색이 눈에 도달한다.
개나리가 노란색인 이유는 노란색이 반사되었기 때문에고,
튤립이 빨간색인 이유는 빨간색이 반사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빛이 다양한 파장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 중 극히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파장 중 우리의 눈에 다가오는 결과값만을 보게 된다.
빛은 연속된 스펙트럼이지만 우리는 이를 완벽히 구분할 수 없었고, 결국 삼원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원하는 이름을 붙이고, 반사되는 색만 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속적인 흐름과 과정을 모른 채, 하나로 수렴된 결과치만 보게 된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처럼. 결과만 보고 오해하는 우리들의 삶처럼.
때로는, 아니 꽤나 자주 우리는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대한민국에는 ‘보호종료 아동’이라는 존재가 있다. 보호종료 아동이란 아동보호시설에서의 보호가 종료되어 시설을 퇴소하게 되는 아동을 의미한다. 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보호시설에서 나와 홀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에게는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자립수당 월 30만원만 주어지고, 그 외의 도움은 전무하다.
이 정도의 돈으로는 서울에는 당연히 거주하기 힘들고, 수도권도 쉽지 않다. 심지어는 이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세상의 찬 바람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식/주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안정적인 주거를 위한 ‘지원금액’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들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돈이 아니라 어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 어른의 존재를 원했다.
우리 눈에는 극장의 단면만 보인다. 무대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추측할 수는 없지만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툼은 없었는지를 알 수 없다. 우리가 튤립을 보고 빨간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보는 색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이해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정의하고, 이를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를 고민했다. 나의 관점이 맞다 생각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이해해보겠다는 말은 정말로 오만한 착각이었다.
대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노력한다. 개개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들어본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은 없었는지, 나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시하기보다는 ‘그럴 수 있겠다’는 말을 속으로 한번 되새기고 대화를 시작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고,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무책임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오늘도 그들과 눈을 마주한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눈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빛의 색상을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에 다양한 빛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
오늘도 그렇게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