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님, 평화해요! 오늘의 채록채록 벗님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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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은 남해에서 만난 벗입니다. 당시 채록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쓴 소개글을 간략하게 공유합니다.
‘우리는 자주 함께 걸었다. 발을 뗄 때마다 찰랑이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과 나풀거리는 원피스까지, 채록은 바람이 흘러가는 대로 춤추는 풀처럼 보인다. 가끔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는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적지가 어디든 뒤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그의 또렷한 목소리를 들으면 남해의 산뜻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2021 다채로운 인터뷰집>)’
첫 만남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꾸밀 수식어를 골라야 했습니다. 채록은 ‘다채로운’을 택했어요. 이유를 묻자 깜찍하게 “내 이름에 ‘채’가 들어가서”라고 말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저한테는 ‘다’가 있어요.” 채록은 해사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습니다. 다채롭다는 표현은 채록과 무척이나 어울립니다. 그는 여러 색깔이나 사람이 한데 어울리게 하는 재능을 타고났거든요.
지금 채록은 호주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가지 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더욱 자유로움을 느끼는지 반짝반짝 빛나는 채록을 보며 행복을 느낍니다. 벗님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40여 일의 모닝페이지를 메모장으로 옮겨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초대자에게 편집을 부탁했는데, 어떤 날을 빼야 할지 한참 고민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전부 소중하고 재밌었거든요. 특히 아실법한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은 반가워 깔깔 웃으며 남겨놨으니 발견해 보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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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부터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아 20분 타이머를 맞추고 글을 썼습니다. 어떤 날은 20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멍하게 채운 날도 있었고요. 어떤 날은 20분도 한참 부족해 한시간을 써 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저는 지금 호주 브리즈번에서 워홀 중인데요. 버스 시간과 페리 시간 때문에 출근시간보다 일찍 직장에 도착하면 근처 벤치에 앉아 1년 전 오늘의 글을 읽습니다. 정말 아무 말이나 써둔 글 덕에 웃다가, 이런 문장을 썼나 놀라기도 하고, 다시 봐도 아픈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든든해요. 내일도 일 년 전의 내가 써둔 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자 조용히 써 내려간 이야기들중 몇몇 이야기를 나눕니다.
* 모닝페이지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2017을 참고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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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0
- 구름이 많이 낀 날이다. 코로나 이후에는 흐린 날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생기다가 <시와 산책>을 읽고 흐린 날도 대놓고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이점이 많다. 아침에 선크림 안 바르고 뛸 수 있다. 밖에서 생산적인 것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중간 드는 해에 반응하게 된다. 지금 이거 쓰는데도 해가 쪼로록 왔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 위와 노트북 위로 얹히는 햇빛 예쁘다. 그렇지 흐린 날이라고 해가 안 뜬 건 아니니까. (무슨 소리)
- 어제 산책하면서 hen의 노래들을 들었는데, 아 봄밤의 아름다움과 hen의 첼로 같은 목소리에 몇 번이나 눈물이 날 뻔했다. 7시부터 8시 사이의 밤 하늘과 나무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그리고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에 내가 있으면 왠지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에 같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가로등 켜지기 전 그 어스름도 좋고, 가로등이 켜지고 난 다음에 나뭇잎 색이 여러 가지로 변주가 되는 것도 좋다. 바람 솔솔. 산책은 정말 위대해. 무용한 아름다움.
2022.04.27
- 사월이 간다. 부산스럽고 변화무쌍한 계절. 나에겐 언제나 힘을 주는 계절. 동시에 너무 큰 기대로 자주 무너지기도 하는 계절. 그러나 그 무너짐까지도 나는 이제 변화의 한 부분인 것을 알기에 괜찮다. 이제 초록이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월이 온다. 원래는 튤립의 계절인 오월인데, 서울숲에 거의 다 시들어버린 튤립들을 보고 여러 생각들이 오가는 오월이다. 환경운동가가 분신자살을 하고 여전히 소고기에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 또 오월이 온다.
2022.04.28
- 세수하는 동생한테 가서 "나를 추앙해요."라고 말했다. 이 대사 재밌다. 그냥 대사를 뱉는 행위 자체가 재밌는 것도 있고, 대사가 특이하고, 연극적이고 왠지 번역투 같기도 하고. 배우는 이런 말맛을 잘 활용해야지. 내가 그 말맛을 잘 아는 배우가 될 것이다.
- 어제 다예 안경 얘기하면서 내가 '다에 할 일 : 우리 만날 때까지 안경 잃어버리지 않기' 라고 썼는데, 이미 식당에 한 번 두고 왔단다. 친구가 챙겨줬다고. 이 글이 나와서 놀라서 쓴다고. 왜냐면 다예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해.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대상을 떠올릴 때, 그냥 즉각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답은 이제 재미없다. 나를 알고, 혹은 나를 모르더라도 나에 대한 관심이 그다음 생각까지 이끌어주는 것. 그리고 그런 말들은 나에게 고유하게 닿는다. 그런 말들을 먹고 자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끔 애매하게 친한 오프라인 친구들보다 블로그나 인스타의 이웃들과 더 진한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서 온다.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는 배려들. 상대방이 남긴 글에서 이 사람에 대한 단서를 찾고, 거기서 유추하는 데에 꽤 큰 생각의 과정들이 들기에 거기서 또 고유한 글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오프라인 친구들 중에서도 이런 배려심과 애정을 자동 탑재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한테는 그냥 충성충성. 내 사랑도 이들의 사랑에 뒤지지 않게 내가 바삐 움직여야 한다. 질 수 없지. 1인을 위한 채원표 사랑 맛있게 맛있게.
2022.05.01
- 작년에 블로그에 써뒀던 일요일 일기가 재밌었다. 난 주로 '가지 마'라는 말에 흔들리는구나.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학생 때 만났던 애랑 데이트하고 헤어질 때 걔가 "가지 마"하는 말이 어찌나 좋던지. 강압적으로 "가지 마!"가 아니라, '나 너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의 애정 어린 버전의 "가지 마"다. 버디버디를 하면서도 "이제 늦었다. 자러 가야겠다." 하면 그 친구는 꼭 한번 붙잡고 나를 보내줬다. 어느 날엔 '가지 마'를 안 하길래, 왜 안 하냐고 하니까. '아 맞다 가지마. 어차피 갈 거잖아.' 이랬던 것도 기억난다. 귀엽ㅠ
- 어제 동생한테 밤 산책 가자고 했을 때 nope했는데, 내가 but it's so beautiful! 하니까 고민하더니 나왔다. 헤헤
2022.05.02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내가 비교적 잘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한 계속 연마하고 싶은 스킬이다. 왜냐면 나도 가끔 머뭇거리기 때문이지. 완벽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말고. 이를테면 "이 자리 비어있나요?"나, "지갑 떨어졌어요."같은 말들 말고. 뜬금없는 말들. 아마 사람에 따라 약간은 어색하고 갑작스러운 말들을 건네는 연습. 하지만 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말들 말고! 만약 불편해한다면 바로 내 입을 막기. 왜냐면 그건 나도 너무 싫으니까.
- 각자 자기만의 실을 갖고 살아가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 실이 부딪혀서 생기는 매듭을 생각하면 그 이미지가 너무 아름답게 다가온다. 어떻게 될지 몰라. 해외에서 내가 좋았던 부분도 그 허들이 낮았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벽을 뚫고 들어오는 게 아닌 낮은 울타리 밖에서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는 느낌. 그 정도가 나에겐 딱 좋아. 같은 부족이고 같은 동네여서 울타리를 다 허물고 있는 것보다는. (아니 이런 관계도 뭐 있으면 좋겠지만, 일상에서 내가 재미를 느끼는 관계는 전자다.)
2022.05.05
- 그러니까 기획의 힘은 정말 중요하다. 나에게 누군가 "이거 같이 할래?"라고 물어봐 주면 나는 높은 확률로 심장이 뛴다. 너무 좋은 말 아닌가? "같이 하자!"라는 말에서 벌써 에너지가 한 번 밀려온다. 숫자와 치밀한 플랜과 촘촘한 구성에 약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판 위에 올라가서 그 판의 안과 밖을 뒤흔드는 아이디어와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 우연과 즉흥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캐내어 튼튼한 기획 속에 하나하나 심어가는 맛을 알고 있다.
2022.05.09
- 어제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자궁 통증이 있다. 막 심한 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아픔. 신경이 쓰이네. 일어나서 네이버에 pms 자궁 통증으로 검색하면 가슴 통증으로 걸리는 글들은 많은데, 자궁에 대한 글은 별로 없고 자궁 통증만 검색하면 임신후 자궁 통증에 대한 글만 나온다. 미레나 수술 후기에서 pms 와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수술 후 자궁 통증에 대한 이야기 나온 것도 보고. 참 여자 몸으로 태어난 거 억울한데 왜 세상에선 그걸 대우해 주지 않나요.
- 생리하는 날은 무조건 유급휴가. pms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pms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노동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 달에 적어도 일주일은 고생하는 여자들을 위해 뭐 음식점 할인이라던가, 생리 끝나고 원하는 체험 지원! 교통비 감면! 많은 혜택들이 주어지고. 완경이 왔을 때도 여태껏 생리를 했다는 그 수고로움을 인정하고 공로하는 의미로 똑같이 적용. 생리를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성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함. 여자는 성스럽게 보살핌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교육이 필요함. (하지만 현실은 생리대 값도 지원 안 해주고 소비자가 여자라는 이유로 핑크 택스 범벅인 세상)
이런 식으로 바뀐다면 생리를 해도 덜 억울할 것 같다. 근데 또 여자들은 착하고 고통도 잘 감내해서 이 모든 것을 잘 적응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겠지. 남자들보다 더 멋진 활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
2022.05.12
- 배우라는 직업은 너무 매력적이지만, 저 위로 올라가는 그 길이 재밌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당연). 그리고 한국에서 나의 여러 가지 환경을 갖고 배우가 되려 분투하는 일에 '내 모든 것을 걸'기에는 나는 다른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다큐멘팅하면서 연기도 거기에 끼워 넣어야지.
2022.05.15
- 내가 서빙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건 어쩔 수 없이 캐나다에서의 첫 워킹홀리데이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팁이 의무인 북미에서 내가 일한 곳은 팁이 그 정도로 의무는 아닌 반셀프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이 테이블을 잡고 서버를 부르는 곳이 아니라, 계산대에서 주문을 하면 우리가 요리를 해서 (안 바쁠 시)에 가져다주고, 보통은 스타벅스처럼 주문할 때 그 사람 이름을 받아서 부르는 곳이었다. 캐주얼한 식당이었는데 값은 또 조금 나가는 곳. 그리고 계산대 옆에 팁 통이 있다. 거기서 그날 그날 받은 팁들을 모아서 같이 일한 친구들과 1/n을 하는 식으로 팁을 정산 받았다. 그리고 한 두 달 후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알게 된다. 내가 계산대에서 주문을 받을 때 팁이 나올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그리고 매니저는 팁 정산을 받지 않지만, 팁이 나온다는 것은 이곳의 서비스에 만족을 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음식도 받기 전에 팁을 내는 경우도 있었음.) 올라운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나는 항상 계산대에 서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계산대에 있는 내가 너무 좋았다.
2022.05.17
- 그리고 한참 후에 서은국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일단 강추다. 행복에 대해 여러 각도로 살핀 후 아주 명쾌하게 답변을 내려주는 책이다. 이래서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있다. 행복을 어떻게-가 아니라 행복이 왜-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결국 행복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의 발행처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할 때 온다는 것. 아니 나는 정말 너무나 분석 가능한 인간의 마인드로 영화와 드라마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장면이 제일 좋아 보인 것. 언제 한번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을 모아봐야겠다. 지금 떠오르는 건, 델마와 루이스의 바 장면, 베이비드라이버의 장면, 비포 선라이즈 (ofc), 너무 너무 너무 많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역시. 그런데 오히려 내가 많이 소비했을 한국 컨텐츠에서는 이런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장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많이 봤는데, 기억나는 장면은 비밀의 숲 포차 정도? 우리나라는 식당에 가면 음식에 관한 이야기거나 아니면 앞에 있는 음료는 손도 대지 않으며 대화하는 씬이 많아서 그런가. 내 기준 너무 익숙해서 그런 건가.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 세이지 감독이라 는것 외에 큰 기대 없이 보는데, 일기 쓰는 부분에서부터 확 집중된다. 누군가 기록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장면이다. 뭔가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섹시하지 않나? 오클랜드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사람 구경할 때, 반대편 테라스 자리에서 곱슬 진 금발머리를 한 남자애가 헐렁한 옷을 입고 작은 노트에다가 이것저것 쓰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안 남. 그 사람이 글을 끄적이다가 길거리를 한 번 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또 뭔가를 썼던 그 행위의 흐름이 그 상황에서 너무 자연스러웠다.
2022.05.20
- 자기 전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거 좀 좋은 것 같아. 좋다고 하기엔 뭣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의 타래가 몰려온다. 생각뿐만 아니라 어떤 무드도 같이 몰려와 내 몸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 머리로만 상상하는 게 아니라 그게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분. 아, 그러고 보니 생각과 말은 정말 중요하구나. 나는 죽음에서 내 살날의 한계를 본다. 그리고 그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거기까지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져서 다시 묘하게 원동력이 생기는 루트인 것 같아.
죽음이라는 그 에너지가 몸에 돌면 멍해지면서 내 몸에서 내가 빠져나오고, 더 이상 육신으로 뭔가를 할 수 없어지는 답답한 듯 자유로운 상태.
- 어제 읽기 시작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 부분이 좋았다. 이 부분이 나에게 힘을 준 것 같다. 좋은 꿈을 꾸게 해준 것 같다.
- 말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을 믿어보고 싶다. 믿어 보게 되는 것 같다.
- 자연과 움직임. 정신과 춤. 글과 나의 본질로 살아가는 삶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직업은 서버이고, 나머지는 내가 좀 덜 잘해도 되는 것들로 채우는 삶.
2022.05.29
- 내가 좋아하는 예술의 형태 중 하나는 감각을 넘나드는 예술.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각을 쓰게끔 유도하는 예술. 그리고 현실에 발이 닿아있는 예술.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충분히 몰입하게 한 후, 갑자기 비일상이 되는 지점. 그 지점에서 나는 내 몸이 붕 뜨는 경험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지만, 우리는 이미 그 세계에 있어서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게 현실적이다. 누군가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내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는 예술. 내가 뱉는 대사 한 줄이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둥둥 울리는 예술.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와 그들의 심장박동까지 같아지는 예술. 나를 보는 시선들이 마치 태양처럼 나의 몸을 데워주는 예술. 그러다가 내가 폭발해 버릴 정도로 뜨거운 무언가가 되어 그들 모두를 데우는 예술.
2022.05.30
- 어제는 다예와 대산대학문학상 낭독회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이대에서 다예랑 친구 마공을 만나서 같이 블랙박스가 아니라 블랙박스 맞나? 무튼 스타트업 푸드코트 같은 곳에서 샐러드도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다예 친구들은 그냥 뭔가 벌써 친근감이 있다. 이유는 몰라. 다들 기본적으로 따뜻함을 갖고 있는 아이들인 게 티가 나서 그렇다.
밥 먹고 걸어오는 골목길이 너무 좋았는데, 셋이서 이거 봐 저거 봐 하면서 지구 위에 편안한 표정으로 누운 소와 왠지 그 소에 감싸져 있던 지구 그림도 보고, 남의 집 창문 옆에 꽤 큰 크기의 피쓰 싸인도 보고 "누가 남의 집에.."라고 했다가 "본인이 그린 건가?"까지도 생각이 미쳤다. 같이 웃곸ㅋㅋ. CU편의점 있던 건물에 고양이가 그림처럼 앉아있는 걸 다예가 발견해서 그것도 보고 CU 느낌 있다고 여기서 편맥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동조해주지 않았다. 나 약간 알콜중독자 같아? 아냐 좋은 사람이랑 있으면 맥주한잔 하고 싶은걸? 낭독회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첫 등장이 가장 이상하고 귀여웠는데, 그냥 갑자기 작가들이 나와서 앉았다. 그리고 혁진 님의 아주 조용한 '네'라는 거의 아무도 안 들릴 소리 같은 말을 시작으로 포문이 열렸다. 그들이 엄청 떨고 있고, 손도 분주하고, 다리를 떨거나 다리를 떨지 않으면 어떤 일정한 리듬으로 발을 움직였다. 긴장한 모습들이 역력했지만, 당선되고 등단되었다는 그 행복을 머금고 있는 긴장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다들 장하고 귀여웠다. 잘 정돈된 단어들로 만들어진 문장으로 밀도 있는 대화들이 지나가는 것 같아 재밌었다. 이런 사람들이랑 술자리를 한다면 또 어떤 맛일까 싶었다. 뭔가 작가들 그러니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에게 약간 조져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글로 나를 압도해 주세요. 내가 아무런 질투 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말을 잘하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에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만 잘하는 것은 오히려 매력이 없다. 가끔 말이 엄청 많은데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배우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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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기러기』 메리 올리버 中
애정을 담아, 마공과 자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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