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두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마냥 큰 울림이 있고, 가슴이 뜨거워져야 좋은 글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있을까? 내 글이 누군가의 가슴을 미지근하게 데운 적이나 있었나. 내 가슴은 미지근할까, 차가울까, 뜨거울까- 그마저도 아니라면 어떤 온도를 품고 싶었나?
글뿐만 아니라 ‘좋은’이 붙은 것을 상상하면 대게 비슷하다. 특별하고 빛나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것.
시작하기도 전에 떠오르는 결말들 앞에서 웃어 보이지도 울어보이지도 못한 채 내 안에 썩어 문드러지게 방치해 둔 것. 비교라는 단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부패를 발효라고 믿게 되는 것.
감히 예상하건데 당신과 내가 좋고 특별하고 싶어서, 대단하지 않아서 쌓아둔 모든 것들을 펼친다면 지구 반 바퀴를 돌고도 남을 것이다. 이건 매번 수없이 늘어진 물음표와 가능성을 남겨두는 내가 확신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구가 손바닥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홍순 씨라는 사람과 동거를 하고 있다. 홍순 씨는 나의 할머니이신데, 나를 참 많이 사랑해주시는 분이다. 사랑만 떠올리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가 대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퍼다 주는 사람. “아 이게 사랑이구나.” 싶어지는.
그 사람은 밥을 먹을 때나, 버스를 기다릴 때, 요리를 할 때, 티비를 볼 때, 잠에 들기 전에 늘 노래처럼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있다. 평범한 이야기. 거친 사막에 호수를 만드는 일보다도 온 마음을 쏟아버려서, 일평생 스스로가 아닌 자식이 먼저였어서. 온몸이 타오르듯 아파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날려버렸다는 평범하고도 진부한 이야기. 자기희생적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다. 지독한 애환哀歡이 묻어나기에 쓴 냄새가 나기도 하는, 코끝이 찡해지기보단 물음표로 가득해져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그 이야기 속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검색이 뭐야 컴퓨터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 한통 날릴 수 있는 전화기도, 우리의 따수운 겨울을 위한 도톰한 옷도, 무더운 여름 거리를 버티게 해주는 손풍기도, 당연하게도 물이 졸졸졸 나오는 샤워기도, 언제든 꺼내먹을 수 있도록 보관해주는 냉장고도. 지금은 당연하다 못해 소중하다고 여겨지지도 않는 것들.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못하였던 시대라 어찌 살았나 막막하면서도 조금은 부러워지는 시절. 나는 종종 그 시절이 부럽다. 왜냐고 묻는다면 쏟아지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숨쉬기가 버거워서, 나를 따라다니는 광고가 나보다 나를 잘 알아서, 샤워기의 물이 너무 잘 나와서, 냉장고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서,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파괴적인 삶을 택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게 지쳐서- 라고 답하겠다. 가끔은 살기 싫게
도 만들어서.
내 손에 쥐어지지 못한 세월은 부럽고,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은 빛이며,
사랑하는 눈동자들의 기대는 빚이고,
완전함을 바라는 마음은 독이며
온도를 담는 건 나의 부끄러웠던 믿음의 몫이 아니었나.
평소 같았으면 반질반질 그럴듯한 말로 토닥여주기 바빴을 나였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썩어가던 빚들을 먼저 꺼내 보이는 게 글보다 빠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내 글은 두 눈이 번쩍 뜨이지도 않고, 가슴이 타오를 듯 뜨겁지도 않지만 당신과 만났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고 빛일까. 어찌 더 빛날 수가 있을까.
좋은 글은 미지근하지도 뜨겁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