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4월 주중의 오후, 한 오픈채팅방이 뜨거워졌다. 이 오픈채팅방이 뜨거워질 때는 대개 누군가 들어와서 고기 사진으로 채팅방을 테러할 때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채팅방에 들어가서 내용을 확인해 보았는데 계속 눈길이 가더라.
‘육식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육식을 누려도 된다.’
‘하나님은 동물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며, 예수님은 동물을 위해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쓰레기를 태양에 가져다 버리는 걸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우스를 쥔 손이 꽤나 흔들렸다. 알지도 못하는 카톡 닉네임 ‘천재’에게 얼떨결에 버튼이 눌렸다. 채식(비육식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까운)을 실천하고 있는 같은 기독교인으로 야무지게 반박해 보고 싶었다. 정말 그럴까?
반박할 무기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한국채식연합 사이트를 찾았다. 한국채식연합 사이트에는 기독교에서 채식과 관련한 말과 글을 모은 페이지가 있다. 여러 성경 구절도 포함되어 있는데, 대체로 문맥과 상관없이 짜깁기한 느낌이 있다. 채식해야 하는 근거가 되기에는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
(잠언 15장 17절)
그 전 구절인 잠언 15장 16절은 재산에 관한 구절이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낫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과 이어본다면 가난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바라보는 것이 맞다.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지게 하거나 꺼림칙하게 하는 것이라면
고기도 먹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고 그 밖의 일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서 4장 21절)
로마서 14장 전체 내용을 보게 되면 믿음에 의해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이들과 갈등이 발생했을 때, 먹는 것에 대한 문제(눈에 보이는 문제)로 서로의 믿음을 판단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천재'에게 반박하기 위해 채식과 관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읽어보았는데 오히려 기세가 꺾였다. 내가 신학자도 아닌데 성경을 통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함께 채식하는 애인을 만날 때마다 항상 논비건 음식을 먹자고 제안하는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자기검열에 한창 휩싸이고 있을 때 문득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 어릴 때부터 채식을 이어온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채식을 시작해서 현재까지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동물이 죽는 게 불쌍해서 내가 못 먹겠더라고. 다만 내가 채식을 하는 게 하나님을 믿는 삶과 연관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채식을 하는 건 아니야.”
친구의 대답 덕분에 끝없는 자기검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채식을 결심하며 실천하기까지,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것,
수명을 다할 때까지 고통받으며 사육되는 것,
홀로코스트 학살 사건이 공장식 축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동물에 대한 폭력이
인간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이어진다는 것.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던 순간에 익숙한 맛을 포기할 힘이 생겼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하셨다.
(창세기 1장 27-28절)
존귀하게 창조된 모든 존재가 존엄한 삶을 영위하는 것. 다스리는 것은 그것을 위해 책임 있는 자세로 서 있는 것이라 이해하며 믿고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보살피며 돌보는 마음이 퍽 중요하다. 채식은 보살피며 돌보는 마음을 이따금 확인시켜준다. 결국 더 사랑하고자 하는 일이다. 조용필이 찾은 해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