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휴학을 결정했다. 애초에 성실하게 다니지도 않았던 학교다. 퍽하면 강의를 빠져 출결 점수가 늘 좋지 않았다. F학점을 받은 강의를 재수강했다가 또다시 F학점을 받은 강의도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학기의 기말고사는 밤을 새워 벼락치기를 하다가 잠에 들어 강의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험이 끝나버렸다. 그리고는 학교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 이태원 참사 추모 문화제가 열리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발 딛고 있는 곳을 시시하게 여기고 밖으로 겉돌았다. 오만 재밌는 것들은 다 저편에 있었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과 있어야 할 곳도 이곳보다는 저곳에 있는 것 같았다. 물어야 했다. ‘나는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된 걸까?’
대안학교에서 서울 4년제 대학까지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3년제 대안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사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대학교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기 앞에 대안학교 혹은 탈학교라는 공교육 밖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아도 선뜻 가겠다고 말하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다수가 가는 길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새롭게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고, 그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대안학교를 간다는 일이 그렇게 큰 용기를 요하는 선택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교사로서 청소년 인권 운동과 진보적 교육운동을 한 삶을 살아오셨는데, 그런 아버지를 둔 특권을 나는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인가형 대안학교였다. 검정고시를 따로 봐야 하는 비인가 대안학교와는 달리, 교육부의 허가를 받았기에 졸업만 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꼬리표를 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고등학교에는 문제의식이 있지만 아예 비인가형 대안학교에 자식을 보내기에는 나름의 염려 또한 가진 모부님들께서 선택하는 곳이다.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선택이라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아등바등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졸업이 성큼 다가왔고, 별다른 미래를 그려보지 않았던 나는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능을 준비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준비한 수능을 또 나름대로 잘 보고, 성적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일상이라 여겼던 개인의 선택과 행동들이 어떻게 사회적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지 분석하는 학문’, 아직 뭔지 잘 몰라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곳 정도면 내가 앞으로의 삶을 꾸릴 장소로 대충 적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사회학과를 졸업해서 쟤가 뭐하고 살려나’ 하고 걱정했지만, 나는 이곳에 적응하기에도 여력이 없어 그런 불안감을 가질 틈도 없었다. 졸업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걱정하는 선배들 앞에서 나는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어요.’라는 여유만만하고 순진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적어도 사회학과는 삶의 경로를 계획하기 이전에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사회학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기보다는, 현실의 조각들을 구슬 꿰듯이 모아 하나의 팔찌와도 같은 구조를 드러내는 학문이다. 그런데 구조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회의 현상들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가르쳐주는 강의는 별로 없었다. 다 체망에 한 번 거른 듯한 깔끔하고 차가운 이론들, 그렇게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요리들을 맛보고 소감을 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지난한 시간을 하나하나씩 감각해야만 한다. 그런데 강의에서는 완성된 요리들만 보여주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해보라!
하여튼 나는 좀이 쑤셔 도저히 강의에 집중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학자들이 세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언어들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들처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내게 어떤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했었다. 다만, 그 이전에 나는 조금 더 날 것의 ‘이야기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맥박이 살아있는 순간들이 몹시도 필요했다. 그게 몹시도 간절했다.
동물권에서 기후정의까지
간절함은 내가 마주했던 죽음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여름 날에 나는 내가 먹어 온 고깃덩어리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들인데, 왜 몰랐을까? 한국에서만 매년 11억 명 이상의 땅을 딛고 사는 동물들이 고기가 되기 위해 죽임당한다. 나의 삶이 그들의 죽음 위에서 길러져 왔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내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세상에 산다는 사실은 참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런 죽음들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을 죽이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서울에서는 동물권 단체를 쫓아다녔다. 책모임으로 시작했던 나의 동물권 활동은,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돼지와 소들을 만나는 ‘비질’ 활동을 하기도 했고, 백화점에 들어가서 기습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학교 강의에 제출해야 할 모든 과제들을 동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웠다. 이 죽음에 대해 누구라도 함께 고민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 죽음에 대해 앞서 고민해 온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학기와 두 번째 학기를 보냈고, 성적은 좋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오만했지만, 대학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참 같잖게 들렸다. ‘여기에서는 날마다 학살이 일어나는데, 저 이론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축산 동물들의 삶을 폭로하고 기성 권력에 호소하는 것에 그치는 활동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기후정의 운동을 만났다. 내가 만난 ‘멸종반란’이라는 단체에서는 부산 가덕도의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직접행동과 같은 활동을 했다.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워서 공항을 짓겠다는 신공항 건설 계획은 많은 생명들을 멸종으로 내모는 결정이자 기후위기를 가속화시켜 모든 이들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렇게 찾아 헤맸던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기후정의라는 말은 기후위기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사회 체제를 지목하기 위한 말이었고, 이 체제에서 모든 것은 이윤을 위한 자원, 수단,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무너지는 가덕도와 학살당하는 동물들과 쫓겨나고 외로워지고 우울해지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기후위기를 바라볼 때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었다. 환경을 위한, 동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궁금했던 것은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는지였다. 학교가 있던 서울에서 본가가 있는 광주까지, 정당의 토론회 연구자들의 학술대회에서부터 서울과 광주에 기후정의를 주제로 모여있는 여러 풀뿌리 사회운동 단체들의 모임까지. 무작정이었다. 무턱대고 찾아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물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기꺼이 맡고 싶었다. 기후정의 운동에 기반을 두고서 평화, 청소년인권, 여성, 성소수자, 장애, 환경까지 다양한 사회운동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넓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세상을 보다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럴수록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건 어려워졌다. 나는 내가 마치 조금 헌신적인 구경꾼 같다고 생각했다. 좋은 활동을 휘적휘적 찾아다니는 노마드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게 조금 지칠 때쯤, 나는 대학도 서울에서의 삶도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척에서 제주까지
여러 사회운동을 전전긍긍하다 보니 대학에서의 공부는 겉핥기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울에 있던 이유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였는데, 서울에서 다른 활동들을 하면서 정작 내가 책임져야 할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그건 내가 대학에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없던 밑천이 바닥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취업을 위한 관문이 되어버린 대학을 비판하면서 정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학을 다녀야 하는 이유를 치열하게 묻지 않았다. 그래서 1년 동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런데 질문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가인 화순에 내려와서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광주에 사는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에서 벗어났더니 삶에 여백이 생기고 세상이 넓어진 것만 같았다. 빽빽한 빌딩 숲과 자동차 바다 위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곳들이 보였다. 삼척, 새만금, 제주 월정리, 구례, 남원,,, 다양한 곳에서 삶을 그려나가면서 생태학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싸움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광주 비엔날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강원도 삼척의 석탄화력발전소를 막으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지리산 방랑단의 펜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남원의 산악열차와 지리산 케이블카에 저항하는 이들을 만났다.
지리산 희망버스를 타고 세종에 도착해 환경부 앞에서 다이인 시위를 할 때 생각했다. 저 정부청사의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건물들은 어떤 이의 죽음 위에 세워졌을까? 지리산과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님들과 새님들, 그리고 자신의 삶도 그들의 옆에 있을 뿐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콘크리트 건물 안에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업무를 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의 옆에 서 있을지 물었다. 어쩌면 기후위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하는지보다 어디에 있는지가 더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집을 함께 쓸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의 공간을 배려하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게 된다.
나의 집이 있는 화순에는 내가 살았던 20년 동안 한순간도 아파트가 세워지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문득 아파트 수십 채가 모여 있는 이곳이 예전에는 광활한 논밭이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곳은 수많은 삶이 땅속에 억지로 파묻혀진 도시였다. 세종 정부 청사를 바라볼 때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운전한 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라는 것을. 그건 아무것도 없는 땅에 이룩한 기적이 아닌 수많은 종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삶터를 밀어내는 학살의 과정이었다. 삼척에서 제주까지, 그렇지 않은 땅이 없었다.
어쩌자고 나는 여기까지 왔을까
제주 월정리에 갔을 때, 그곳에서 해녀 투쟁을 하고 계신 한 활동가 분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오게 된 줄 모르겠다. 그저 해녀들을 만난 순간부터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 나를 지금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내가 해녀들을 꾄 것이 아니라 해녀들이 나를 꾀었다. 완전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제주도정에서 해녀 분들을 꾀어 하수처리장 반대 활동을 하지 말라는 말에 익살스레 대꾸한 답변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그래서 서울에서 제주도를 갔다가 다음 날 바로 구례를 가야 하는 그런 미친 일정을 소화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가 해녀들을 제주도를 지키고 싶은 마음처럼 내게도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의 홍보 문구도 ‘아름다운 것을 본 죄’이지 않나. 그저 막연히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었다. 여기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병역거부에, 주거와 생계, 진로와 직업, 사회과학 공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까지, 책임져야 하지만 아직 시작도 못 한 고민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순서를 차근차근 밟고 있는 것이라 마음을 다지고 조급하지 않게 하나하나씩 차분히 해보려고 한다. 이번 여름에는 구례에 가서 두 달 정도 살 것이다. 촌에서의 공동체와 생태적인 삶에 대해 그들에게 배울 것이다. 또 지리산에 있는 페미니즘 학교 탱자에서 페미니즘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내게 예상치 못했던 단단한 길이 주어지리라 믿는다. 처음 동물의 죽음을 만났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 지금까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이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참고) 환경의 날, 함께 읽어보고 싶은 글들
1. 기후’정의’에는 인간만 포함되나요? - 동물해방이라는 가능 세계
2. “데모하는 게 벌 받으면, 데모하게 만든 사람들은 무슨 벌을 받습니까?”
3. 기후위기, ‘막아내는’ 것이 아닌 ‘함께 겪는 것’
4. 기후위기, 자본에 의한 ‘생태 학살’… 언제까지 방관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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