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벗님이 될지도 모를 받님들께-
저는 자야와 마공과 교수자와 학습자로 만났습니다. 각기 만난 때는 다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결이 닮았고, 저에게 아름다운 깨달음을 준 벗님들입니다. 자야는 2017년 포항 지진을 모티브로 하여 ‘모두의 안전’이라는 장애인 재난 대처 도우미 어플을 기획했던 것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고, 마공은 자신을 변화시킨 학습경험을 작성하는 과제에서 여러 가지 내용과 더불어 2015년부터 자신이 보았던 주요 영화리스트를 함께 보냈는데 그 리스트를 보며 공감하고 궁금하고 짐작하며 즐겁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두 벗님들 외에도 강의실에서 만났던 수많은 학우들이 저에게 수많은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여정을 시작하는데 적지 않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배움을 즐기고 갈구하는 이들을 보며 오히려 제가 배움을 배운 셈입니다. 사제의 연쇄는 역할과 관계가 아닌 각 동사가 서로에게 녹아들어 그 자체가 희미해질 때 가장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지금 영어공부를 위해 캐나다 캘거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생활이 한달 반이 지났습니다. 제게는 낯선 매일이 50번이나 반복된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지만, 생활의 관점에서는 무엇 하나 단정해서 말하기가 어려운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고도 새롭게 만난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펼쳐내봅니다. 더디고 미정인 상태 역시 서술될 가치가 있으니까요.
캘거리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해발고도가 높은 편입니다. 1045m라고 하니 해피 700이라고 부르는 평창보다도 한참이나 더 높은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더 청명하게 느껴지고, 자외선은 강렬하고, 공기는 꽤나 건조한 편입니다. 9월에 첫눈이 내려 5월에도 드물게 눈이나 우박이 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4월의 눈은 경험했지만 5월의 눈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강렬한 자외선 때문인지, 춥고 긴 겨울때문인지 캘거리의 대부분의 건물이나 가게는 선팅을 해놓아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청명한 하늘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시거리가 짧게는 25km, 멀게는 35km까지 보이는데 강 건너 마을에 차나 사람이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어서 마냥 신기합니다. 이런 청명함이라면, 몽골 사람들만큼이나 캘거리 사람들도 눈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반면 건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가 날 정도의 건조함, 온몸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과 동시에 여기저기 가려워지는 건조함이 계속되다보니 한국에서는 잘 먹지 않던 물을 하루에 1.5-2리터씩 들이붓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물을 많이 마십니다. 어학원 선생님을 비롯한 대부분 학생들도 1리터가 족히 되는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물을 마시고, 식당이나 술집에 가도 서빙하는 직원들이 자기 텀블러를 가까이 두고 수시로 꺼내서 마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공원에서도 아이들 역시 텀블러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심지어 2리터짜리 큰 보틀을 들고 다니면서 물을 마시는 사람도 본 적이 있네요. 그러한 건조함은 화재를 많이 불러옵니다. 캘거리에서는 정말 화재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다운타운 근처에 살고, 다운타운에 있는 어학원을 다니는 저는 거의 24시간 소방차 소리를 듣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건물도 경보가 울려서 소방관들이 출동해서 확인을 하고 갔습니다. 아마도 캘거리에서 가장 열일하는 직업이 소방관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봅니다. 얼마 전 발생한 캐나다 알버타주의 산불은 이곳에도 스모크와 연기냄새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강원도의 산불이 서울하늘을 연기와 냄새로 물들인 셈인데, 화재현장의 참혹함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자연도 부디 빨리 회복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학원은 이제 6주를 지나 7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3시간씩 수업을 듣습니다. 수업은 매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1-2개의 문법을 매일 말하고, 듣고, 쓰고, 읽으며 프랙티스를 합니다. 월요일에는 그 주제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화요일에는 관련된 문법을 주로 다룹니다. 수요일에는 발음이나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결합하여 프랙티스 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리뷰와 프랙티스를 반복하며 시험을 봅니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도 제대로 체화하기가 쉽지 않음을 매번 절감하며 자주 절망하고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한 주는 리딩, 라이팅, 문법 시험이 있고, 또 다른 한주는 리스닝, 스피킹, 문법 시험이 있습니다. 2주 동안 각 시험평균이 기준점을 넘으면 레벨업 테스트를 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절대평가인 셈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다들 각자의 공부를 해나갑니다.
지난주 수업주제는 ‘도전 challenge’였습니다. 일상에서, 일에서, 집에서, 관계에서, 스포츠와 같은 액티비티에서 도전의 경험을 나누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도전 challenge’의 다른 의미는 ‘어려움 difficulties’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 ‘도전=어려움’이라는 것이 새삼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매일의 요리, 매일의 청소, 매일의 운동, 매일의 기상, 매일의 시간관리 이 모든 것이 도전이기도 하다는 것, 왠지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영어로나마 여러 파트너들과 일상에서, 일에서, 집에서, 관계에서, 또 다른 활동에서의 어려움을 견디고 버티며 해나갔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어려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의 많은 것들을 그만두고 떠나온 저는, 한국을 떠나온 그 자체가 가장 큰 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도착하니 더 큰 도전은 일상 그 자체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어려움 투성이입니다. 매일 한두끼를 제대로 해 먹으면서 하루 3시간의 수업을 듣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귀가해서 씻고 잠깐 과제를 하면 잘 시간이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약간의 여유를 부리며 복습을 하다보면 학원 갈 시간이 됩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그야말로 단출하지만, 그 단출한 일상마저도 매순간이 어려움과 실패 투성이입니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주문하는데도, 길을 찾아가는데도 늘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모른다는 것, 낯설다는 것, 새롭다는 것은 결국 시간으로 그 값을 치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한 친구가 어학원 선생님에게 동명사와 to부정사 동사가 너무 많아서 구분이 어렵다면서, 그걸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저는 그 전날에 한국어로 ‘동명사/to부정사 동사 기억하는 법‘을 검색해봤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방법을 알려줄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대답은 “No. Just Practice, More Practice.”였습니다. 단지 시험을 위한 것이라면 방법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동명사/to부정사 동사‘를 말하고 듣고 읽고 쓰기 위해서는 결국 프랙티스가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프랙티스는 연습,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이국생활에서도 자주 실패하고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나를 견디고 이해하며 무력하고 생경한 시간을 버티어내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마주하고 있는 도전이자 어려움이기도 하고 제가 해내야 할 프랙티스이기도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던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제가 스스로 선택한 자리에서 자주 깨닫는 무지와 무력, 무능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애정할 수 있기를, 그 애정의 힘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단단해지는 희망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같은 어려움임을 공감하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슷한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받님들을 마음으로나마 격하게 응원하고 지지를 보냅니다. 가끔의 행운과 자주의 행복도 기원합니다. 수고했어요, 오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