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나는 소요산역이었다. 출근 시간 만원 지하철에 군복을 입은 내가 퍽 어색했다. 또 어느 순간 나는 부천의 길을 뛰듯이 걷고 있었다. 머리는 택시를 타라고 하지만, 왠지 빨리 도착하고 싶지않았다. 그저 자신이 없었다. 도착하면 이게 다 진짜일 것 같아서, 사실이 될까 두려웠다. 허둥지둥 도착한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퇴근하는 길 새벽 2시, 교통사고였다. 다음 날 내 휴가 출발에 맞춰 데리러 온다고 했던 아빠가 죽었다. 날 본 엄마와 누나는 나를 보고 울었고 그렇게 나는 가장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대부분 나와 누나의 친구들. 혹은, 알지도 못하던 친척 어르신이었다. 대부분은 장례식이 처음이었고, 우왕좌왕하는 내 친구들에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저마다 다양한 절과 인사말에 누나도 엄마도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웃었다. 심지어 육개장이 맛있다고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또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녹초가 되어버린 엄마와 누나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장이고 싶었기에. 화장하기 전후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납골당에서 사진을 든 순간에야 비로소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3일은 순식간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도 나에게는 아직 5일의 시간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먹었다. 그 기간동안 술이 맛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맨정신으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라도 술을 먹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술을 마시고 취한 채 쓰러졌다. 휴가에서 복귀한 이후 나는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하던 대로 하루하루에 임했다. 물론, 때때로 슬퍼지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하루하루 일부러 바쁘게 살았고 생각이 날 때면 일부러 몸을 혹사시켰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나는 전역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거의 평생을 살았던 인천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갔고 복학 후 휴학까지 세월은 너무 빠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의연하게 적응해 나갔다. 일단 장사를 그만두었고 다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전에 비해 대화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엄마와 더 친해졌다. 여행도 자주 다녔고, 다같이 술도 자주 먹는다. 아빠 이야기도 많이 한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상처를 그저 덮어두면 곪을 뿐이다. 뻔한 말이지만 상처는 바람을 쐬고 자주 들여다봐야 딱지가 생기고 흉이 덜 생긴다. 이젠 딱지가 예쁘게 자리 잡았다. 언젠가 딱지가 떨어지고 흉이 조금은 남겠지만 그 흉도 결국에는 피부의 일부이자 나의 일부이다. 흉은 나에게 흠이 아니다. 담담하게 인정하고 그 흉마저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같이 갔던 거제도, 가게 문을 닫고 들어와 새벽에 시켜 먹었던 치킨.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술까지도 내 모든 곳, 습관, 성격, 얼굴마저도 아빠가 서려 있다.
마음껏 그리워하고 마음껏 추억해야지. 기억은 살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으니깐.
난 오래 살 거다. 오래 밝게, 긍정적으로, 힘차게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