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받님들께 어떤 얘기가 덜 지루할까를 한참 고민했습니다.
지난 2월에 결혼한 저로선 ‘둘이 사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제목에서 보셨듯 저는 스물여덟 살에 남성 기혼자가 되었고 그 희소성이 썩 흥미롭길 바라면서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없으면 죽을 것 같아서, 죽고 못 살아서”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뭘 그렇게 서두르냐?"는 얘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러게요. 실은 저도 ‘너무 이른 것 아닌가?’란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결혼은 분명 돌이키기 쉽지 않은 행위이니까요. 매사에 과할 만큼 신중한 성향인 저로선 고작 27년 남짓 살고, 만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애인과 남은 60여 년의 삶을 속단한다는 것이 시원치 못했습니다. 왜 3년까지는 흔히 ‘콩깍지’라 불리는 사랑 호르몬이 뿜뿜할 시기라고만 하잖아요. 뭘 해도 예쁜 짧은 시기가 지나면, 뭘 해도 거슬리는 긴 시기가 기다릴 것이 어쩌면 뻔하니까요. 경험하지 못한 미래가 두려웠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의 남주인공이 되기 싫다는 자기방어 기제도 작동했습니다.
차분히 정리해 보니 두 가지 전제를 따져야만 했습니다.
첫째, “불같은 사랑은 매번 유한한가?” 그리고 둘째는 “그래서 결혼을 할 것이냐 말것이냐?”
사랑의 유한성을 이해하고, 결혼이라는 최종 목표를 설정하니 답은 명료했습니다. ‘결혼하여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지내야만 한다면 정말 좋은 친구, 평생토록 우정을 유지할 수 있는 매력이 분명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요.
꽤 냉정히, 감히 애인을 마구 평가해 보았습니다. 살펴본 애인은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상대방의 식성을 먼저 고려하고, 그릇에 각자의 몫을 배분하고 나서야 본인의 식사를 시작하고, 언제 어디서 부딪혀도 마땅한 제 자유로운 몸뚱어리를 매번 감싸주기도 합니다. 기억력이 유독 좋은 탓에 제가 중요한 일정을 잊어도 본인이 기억하면 된다며 웃어넘깁니다. 늘 성급하고 칠칠치 못한 제게는 매우 보완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결혼하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떠나보낼 수 없는 친구라는 판단이 앞섰습니다. 연애 상대로서는 이별할 수 있어도, 쉬이 절교할 수 없는 친구였기에요. 그렇게 제게 결혼은 하나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만난 지 고작 2개월도 되지 않았던 때 "서로 더 이상 눈만 봐도 섹스하고 싶지 않을 때"에 대하여 자주 토론했습니다. 안정기에 접어드는 사랑의 모습이 어떨지, 그때에 우리가 서로에게 뾰족하지 않은 말투로 건강히 지낼 수 있을지 등에 대한 무드 없는 얘기요. 다소 재미없고,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제 궁금증에 한참을 고민한 뒤 진중한 답변을 내주는 그에게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콩깍지 씐 커플이 알콩달콩 호프집에서 낸 결론이 무슨 신빙성이 있었겠냐 마는, 아무렴 괜찮았습니다. 덧없는 고민을 진지하게 논하는 우리가 우스꽝스런 동시에 감격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어떤 주제로든 차분히 대화할 수 있는 토론 상대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으로요. 전 하릴없는 주제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서로의 용감함과 무모함을 무기로 20대에 악명 높은 웨딩업계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여러 관습이 덕지덕지 처발린 결혼이라는 지독한 이벤트를 마치고, 함께 산지 반년이 조금 넘었네요. 매일 키스하지는 않지만 자주 배꼽 빠지게 웃는, 둘이라서 두 배로 복작한 삶을 지내고 있습니다.
덜 오글거리는 얘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진부하고 납작한 격언에 대한 내용입니다. 보통 결혼이란 이벤트의 필요조건을 '사회경제적 준비'로 여길 텐데요. 간단히 말하면, ‘직업’과 ‘자산’일 것입니다.
저도 시작은 같았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30대 초중반쯤 결혼하고 싶다는 막연한 계획을 품고 살았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이른 타이밍에 결혼을 결심하고 형성가능한(?) 제 자산을 따져봤는데요. 월급쟁이로 살면서 3년 뒤 5년 뒤 대단한 목돈이 생기냐? 그렇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요. 수학적으로요. 그러면 되도록 빨리하는 게 이득이겠다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이 났습니다.
큰 틀을 결정했으니 본격적으로는 거취가 문제였습니다.
이직으로 마침 독립할 시기였고, 때마침 국가 전세대출상품의 조건이 좋아졌고, 서로의 출퇴근하지 적당한 지역의 신축 빌라가 잔뜩 지어졌고, 전세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연봉상승을 이뤘고, 때마침 아내는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깡통전세를 피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대출 관련 유튜브를 공부해서 어찌저찌 집을 구했습니다. 우연들을 솎아내어 필연으로 꿰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결혼식이 학부생의 조별과제였다면, 결혼 이후의 삶은 업무로서의 직장생활 격입니다.
먼저 결혼식은, 신부 입장할 때의 노래는? 퇴장할 때 손짓은 어떻게 맞출까? 결혼식장의 버진로드의 길이는? 수천 개의 토의 주제가 있고요. 부부로 함께 살 때는 분기별 수많은 안건이 상정됩니다. 이를테면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 방문에 대한 건‘, ‘친인척 경조사 부조 금액 통일에 대한 건’ 등으로요.
하여 부부로서의 매일매일이 따사롭고 행복한 봄날 같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친구인 동시에 동료인 서로는 늘 온화함으로만 대할 수 없어서요. 되려 삶 전반에 깔린 업무로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프로답게 굴어야 합니다.
우아하게 표현하면,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합가의 시작을 알리는 능력치에 따른 적절한 가사 분담은 두말하면 입 아픕니다. 외출 준비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리는 그를 재촉하다가 뾰족해지지 않기 위해, 아내보다 30분 늦게 일어나 준비를 시작하는 시간 배치, 배고픔이 예민함으로 번져 싸움의 엄한 시발점이 되지 않도록 배달 음식은 10분 이내에 고릅니다. 곳곳에 사소한 지혜를 안배하는 일입니다.
함께 산다는 건, 각자 다른 기준의 ‘청결함’을 조정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게 너무나도 지저분한 바닥의 머리카락들이 아내에겐 무탈하고, 아내에게 지저분한 욕실의 물때가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더럽다’고 규정할 수 있는 n개의 조건이 함께 사는 공간에는 득실득실합니다. 서로가 보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대신 봐주는 감사한 존재가 될지, 지저분하고 청결치 못해서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일지. “아 다르고 어 다른” 경계선에서, 사실 저희도 원만한 협의를 위한 투쟁의 나날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함께 사는 것은 해봄 직한 것 같습니다.
건강한 식탁을 꾸리는 일, 함께 밤낮을 지내는 것이 큰 묘미거든요. 언제 들어갔는지 까마득한 냉동실에서 식재료를 꺼내고, 해동과 동시에 수다를 시작하고, 요리하지 않는 이는 수저를 놓고, 한껏 차려진 식탁 앞에서 그날의 분노를 토하기도 하고, 딴생각이 들지 않는 자극적인 맛의 인스턴트 식단인 날에는 말없이 예능 영상에 한껏 집중하기도 합니다. 식탁에선 주로 노동자의 철학과 고단함에 대해 한참 논하다가도, 이부자리에선 다시 방귀 소리에 낄낄거리다가 잠드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반복되는 시간이 삶의 큰 동력이 됩니다.
어쩌면 반려인은 쾌락, 자극과는 거리가 먼 존재인 듯합니다. 매일 같은 잠옷을 입고 찐빵처럼 팅팅 부은 얼굴과 숙성된 입 냄새로 매 순간에 함께하니까요. 돌이켜보니 이전까지의 저는 ‘예측불가능한 것’들로부터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데이트마다 색다른 애인의 헤어스타일, 내 취향의 옷차림처럼, 새로운 것은 놀랍고 놀라운 것은 대체로 즐거웠습니다. 함께 살다 보니 행복을 느끼는 기준과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 큰 변화이고, 다행히 저는 그 변화가 달갑습니다.
예쁜 착장으로 레스토랑 가는 횟수는 적어졌지만, 각자의 생일에 미역국을 잔뜩 끓여 냉장고에 쟁여두고 묵은 반찬으로 여러 끼니를 때우는 시간도 꽤 즐겁습니다.
내 행복의 감각을 풍부히 일깨워 주고, 그 변화를 달갑게 하는 존재는 썩 괜찮은 동료(친구)인 것 같습니다. 그건 꼭 결혼이라는 번거로운 사회적 이벤트를 해내지 않아도 우리 곁에 있을 테고요. 사람일 수도, 반려동물일 수도, 식물일 수도요.
나의 행복을 발견케 하는 지혜로운 생명이 받님들 삶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고 결론도 없는 긴 글을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신혼인 저는 앞서 먹은 용감함이 무모함과 후회로 귀결치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당장 오늘 저녁의 밀린 설거지를 미루지 않는 일입니다.
다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