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우선 인사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이제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이 글을 적고 있는 저에게도 가혹한 여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는 때때로 더워지고, 때때로 습해지고, 미세먼지가 가득하다가, 또다시 쾌청한 날도 다가오겠지만. 날씨와 무관하게-혹은 유관하게- 우리의 마음은 일렁이기도, 몰아치기도, 또다시 저물어버리기도 할 테니까요.
요즘엔 무심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원치 않는 일에 얽매여 적은 돈을 받으면서 주 5일의 노동을 하다 보면, 심지어 퇴근 후에는 무엇도 하지 못한 채로 잠들고, 다시 출근을 하다 보면, 펑 터질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런 마음이 들어서 울적할 때면 다른 곳보다 조금은 긴 점심시간에 옥상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며 낮달을 바라봅니다. 그거 알고 계시나요. 낮에도 흐릿하지만 파랗게 달은 뜬다는 것을요. 저는 알고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낮달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달은 낮에도 뜬다고요. 저는 밤의 달보다 낮의 달이 더 좋더라고요. 흐릿하지만 그래도 계속 떠 있는 게 우리의 기억 같아서. 어쩌면 나보다 먼저 떠난 친구들이,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계속 우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생각을 그대로 적어 내리는 건 실제로 제가 그것에 대해 매번 생각하고 있어서 일겁니다.
이 글은 그냥 일상의 기록이기도, 제가 읽은 책의 기록이기도, 제 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애도이기도, 그리고 내 곁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기도, 또한 제 글을 읽어 주고 있는 당신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담아낼 순 없지만, 각자의 체계 속에서 그렇게 느껴지게나마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1.
우리가 발화하는 언어들은 누군가의 세계 속에서 바다를 건넙니다. 그리고 그 바다를 건넘으로 자신이 발화된 세계를 벗어나 저 먼 가능성을 향해 갑니다. 사람 간에도 각각의 언어는 다른 체계를 가지고, 우리는 다른 세계를 가지고, 외부의 구조 속에서 대략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걸러진 채 타인에게 수용됩니다. 저는 그 수용의 과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서로의 다름이 맞부딪칠 때 생기는 파열들에 대해서, 견딜 수 없게 사랑스럽고, 견딜 수 없게 슬픈 날들에 대해서. 날아오르지만 긍정적일 수만은 없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언어로 번역된 기억은 달과 같아서 이따금 보이지 않은 것 같을 때에도, 때때로 내 시야에 따라서, 내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언어화된 기억은 계속해서 떠올라 있고, 우리는 그 기억과 언어를 받아먹으며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아닌 생각과 아무것도 아니게 된 말들. 우리에게서 벗어나 저편으로 날아가다가 주저앉아 버리는 단어들의 연속. 이런저런 언어를 더 이상 건넬 대상이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죽음. 우리의 관계 속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의 차이점을 생각합니다.
반짝이는 것은 찰나와 같고, 빛나던 순간들은 말 그대로 순간이지만, “오래 쓰도 못 허고, (...) 기름기만 쪽 빼묵고 도망가는 것”들도, 채워진 적이 없어 그렇게 갈망하거나 위로받길 바라던 순간들도 결국, 항상 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달과 같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검정콩처럼 반질반질한 눈으로 내게 슬픔을 묻던 그것”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존재합니까. (인용부는 이현수, 『신기생뎐』)
2.
달을 바라보는 저와 저에게 바라보여지는 달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비가역적인, 돌아갈 수 없는 세계관을 뚫고 이 글 속에서 하나로 말해집니다. 우리는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 글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간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제가 적은 것들과 제가 적지 않은 것들은, 당신이 평상시에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과 건넬 수 없는 말들은, 우리가 적어 내린 침묵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흘린 언어들의 궤적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언어는 체계를 잃고, 자발없이 흔들리며 난파된 채로 떠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무언가가 됩니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간격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가 그 속에서 겪는 사건들과 그 사이에서 파열하는 감정들과 부서지는 마음과 이미 부서진 것들과 그것을 기워내는 우리의 아픔들과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떠도는, 이 세상을 지속해나가는 힘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서로에게 죽음으로 비치는 걸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의 죽음이 되어주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애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이 있음으로, 옆에 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단어를 건너뛰어서 말해지지 못한 것들마저도 오롯이 품고 서로의 곁에 저물 수 있다고 약속하는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품은 적 있습니까.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조차도 그럴 수 있다는 오만조차도 어떤 형태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말하다가 벅차오르곤 하는 일들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사랑이라고 아는 것과 사랑이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다릅니까. 신, 이라고 모두가 하나의 신전 안에서 예배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신, 이 다른 것처럼 사랑, 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오만하고 착각하고 결국 우리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어안지 않습니까. 잘 맞는다기보다는 꾹꾹 눌러 담아 받아내는 순간들을 지속하다가 이따금 지쳐버리고 결국 무너지는 방식으로만 설명되는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죽음들. 그리고 애도하는 순간 무너지고 무너져 서로에게 도달하는-그러나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고요한 격정의 순간들을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합니까.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하는 말들이 일으키는 소란. 우리가 읽어내는 궤적들은 말하고, 말하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지속합니다. 그 지속하는 힘을 사랑이라 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서로에게 무너질 수 있습니까. 달은 언제까지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습니까. 달은 언제까지 우리에게 떠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달이 낮에도 뜨는 것을 언제나 기억합니까.
3.
팽이는 가열차게 돌아가다가도 점점 속력이 떨어지며 결국 멎어버리기 마련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관계는 연속적이지만, 순간은 불연속적이고 그 많은 것들을 그러모으기 위해 어느 곳도 쳐다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까. 불연속적인 순간은 불확실하기에 우리에게 언제나 새롭게 주어집니다. 새로운, 것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름 붙이기 곤란하고 이름 지어주기도 싫지만,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감정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을 기억합니까. “갑자기 사라져서 다시는 발견되지 않는 딱풀이나 지우개처럼, 감정도 그렇게 되길 바랐”던 순간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온전히 좋은 기억이란 흔치”않고, “기쁜 일엔 죄책감이 묻어있고 사랑엔 자괴감이 따라”옵니다. 날아오르는 것이 환희와 기쁨만이 아니라, 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이 절망과 불행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것도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오롯이 떠 있는 것들은, 날아오른 것들은 그러합니다. 저를 계속해서 공전하게 하는 시간들, 기억들, 단어들, 일종의 언어들은 이따금 추악하고, 적나라하고, 그런 유의 욕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죽은 것들을 끌어안으면서 살아갑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은 감정들, 잊히지 않게 기워내는 기억들, 깨어지고 불완전하게 멈춰버린 조각들을 이따금 주워 담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일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과 닮았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자꾸만 바라보다가, 자꾸만 잊어버리고, 한 번씩 다시 생각하면서, 왜 잊고 있었지, 를 고민합니다. (인용부는 최진영, 단편집 『팽이』)
4.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다 보면, 우리의 속을 뒤집어 보면 모르는 게 나옵니다. 알고 있었던 것들은 사실 그 이상의 것들만 담고 있어서, 그저 바라보고 멍하니 쳐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덮쳐오는 것.
그 아이를 개라 말하고, 자꾸 짖는 게 나인지 개인지 모를 순간 속에서, 잘 모르겠다는 건 생각하지 않아도 결국 덮쳐오기 마련이라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은데. (황인찬, 「오수」의 변형)
어떤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밀려오는 절망 같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지연된 채로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것
흔히 사랑을 말하는 시 속에서 사랑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이 붕괴될 때의 다정함도 치밀어오르는 토기 같은 벅참도 어느 순간 멈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그저, 사랑했던 것들을 그리면서 무언가를 바라는 순간의 시선을 기억합니까. 자꾸만 짖어대는 개와 다르게 호명되는 아이와 다르게 말하면, 일상의 어느 순간 내게 무수히 밀려오고 덮쳐오는 수백 수천억의 다른 기호들. 그 틈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나와 친구들이, 당신과 또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 다른 세계의 벽을 넘고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이렇듯 우리가 가지는 감정들은 연속선상에 불연속적으로 절합됩니다. 보고 싶다는 말은 누군갈 보는 순간을 그린다는 말이고, 누군갈 보는 것을 상상하면서 하는 상상은 이따금 현실이 되고, 현실이 될 수 없더라도 내게 있어 그 생각은 현재적이니까. 감정들은 툭 튀어 파문을 일으키니까. 누군가 나를 지나치는 순간과 관계 속에 방치된 저와 누군가 죽었더라도 그 사람의 기억을 파먹는 나의 상상까지도 현재적이라면, 순간은 우리에게 온존하고, 그 순간은 절대적입니다.
보고싶어 했다는 말과 보고싶다는 말과 보고싶었다는 말은 그래서 동일합니다. 시제의 차이는 세계의 차이를 말하지 않고, 글은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글 속에서 모든 건 하나로 접히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적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편에 내리는 적적함과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일. 끊임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누군가와 같이 우산을 쓰다가, 눈을 뜨면 혼자 누워있는 방.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게 동시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순간들. 현실에 가닿을 수 없는 상상력을 풀어헤치는 게 현실에서는 하나의 비언어적 행위로 통일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살할 생각도 없이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 속에 뛰어드는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같고, 느닷없이 불이 나는 현상들, 그 아이는 개가 아니지만 개로 적어내는 상상들, 그런 상상을 멈출 수 없는 순간들, 당신이 나를 보고 짖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그러다 내가 방치되는 순간들은 글편을 벗어나는 순간 가닿지 못하고 흩날리는 것으로 변합니다. 끊임없이 낯설고 선연한 감각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와 끊임없이 작별하는 일이고,
슬픈 것은 슬픈 것으로 남지 않은 채 슬퍼하는 우리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슬픔 역시 다른 것으로 이어지겠지만, 누군가와의 작별 이후에 모든 것들은 화석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겠죠.
무언가 발생한 흔적들을 더듬어 나가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마 그렇게 죽을 때까지 떠들어대곤 하겠죠.
5.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인 황정은은 그렇게 적습니다.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인용부는 황정은, 『일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건 어쩌면 사랑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사랑하고,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사랑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역시 사랑일 테니까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나를 비춰주는 기억들과 하나의 세계 속에 같이 뭉뚱그려질 수 있다면.
때때로 지칠 때마다 황정은 소설에 나오는 구절들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삶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지 궁금할 때마다, 어쨌든 밀고 나가려면 이따금 우리는 폭력적이어야 하고, 이따금 사랑스러워야 하고, 이따금 말라버려 시든 채로 울고 있다가, 다시 일어나길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되는 우리의 사랑 속에서, 우리가 계속하는 것들은 우리의 언어로 전부 설명되지 않고, 그보다 더 많이 담겨 있거나 덜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달은 언제나 떠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처럼,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언어적인 것보다는 그 언어에 서려있는, 우리의 시선에 서려있는 감각을 사랑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어보다 더 선험적이거나, 이따금 뒤늦게 따라붙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무언갈 바라보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너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줄까, 너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그리고 어쩌면 사랑스러운 고백을 계속 곱씹게 되는 것입니다. (인용부는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6.
저는 우리의 말들이, 우리의 언어가 언제나 반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쉽게 저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낮에도 떠 있는 낮달처럼, 흐릿하게나마 떠서 우리를 비추기를 바랍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조만간 여름이 오겠지만, 이따금 한강을 가고, 이따금 옥상에서 계속 달을 보다가, 한 번씩 지나간 사람들과 기억, 언어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소 사람들과의 작별인사는 행복하세요, 라는 말로 대체하는 편입니다. 당신도 일상 속에서 조금이나마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황정은처럼,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