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
찬 바람이 온몸을 오갈 곳 없게 만들던 밤이었다. 그때 정용이 내게로 왔다.
“동경대를 나오셨다구요?”
추위를 피해 들어온 곳은 천호동의 한 곱창집이었다. 외투를 벗은 그의 몸집은 초등교육을 겨우 마친 소년의 것을 연상시켰다.
“예. 왜요?”
“아. 일본에서 학교 다니셨다길래 나는 모르는 학교이겠구나 했는데, 일본 대학 중에 제가 유일하게 아는 데여서요.”
달아오른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는 곱창의 소리가 정용의 목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그는 내가 질문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질문하기 전에 너무 많은 말들을 하는 남자들이 지겹던 찰나이기도 했다. 외로움이 떠민 자리였다. 데이트 어플 속의 정용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사진 한 장 이외에는 어떤 정보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하트모양 버튼을 눌렀다.
“술 드시겠어요?”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는지 가늠할 수 없던 시점이었다. 정용은 내가 무슨 말을 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듯 무심히 젓가락질하거나 곱창을 씹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도 마주 앉아 있었다.
정용은 술을 시키려는 듯 손을 들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그를 봐주는 직원이 없었음에도 그는 절대 입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누군가 자신을 보아주길 오랫동안 기다렸다.
술이 나오자 정용은 여전히 별말 없이 내 잔을 먼저 채워 주었다. 술이 들어가자 몸속 깊은 곳까지 숨어들어 이따금 소름이 끼치도록 만드는 한기까지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씩 자주 질문했고 정용은 물은 만큼만의 답을 해 주었다. 그의 대답 속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었다. 나라면 진작 이야기하고 싶어 좀이 쑤셨을, 그러나 그에게 과장이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가 자꾸 더 알고 싶었다.
그날 정사 후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없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섹스 중에 정용이 먼저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일본말이었던 것 같다. 그걸 떠올리려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나 타는 갈증에 다시 눈을 떴다. 그가 뭐라고 했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목말라.”
옆에서 잠들어 있던 정용이 조용히 일어나 생수병을 가져와 건넸다. 그때 나에겐 물병을 받아 들 힘도, 힘이 없다고 말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의 반응에 정용은 내 허리춤에 앉아 생수 뚜껑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입속에 물을 가득 머금곤 내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아주 조금씩 차가운 생수를 입에서 입으로 흘려보냈다. 나는 무력하게 누워 그것을 받아 삼켰다.
“더 줄까?”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수병을 들어 마시는 그의 벗은 등이 모텔 방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아름다움인 것 같았다. 다시 입을 맞췄을 때 너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그의 살결 또한 그랬다. 나를 위해 고된 노동을 하던 나의 아버지나, 혹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몸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 늙고 야윈 아름다움 앞에서 젊고 풍성한 나의 몸뚱이는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때, 그가 흘려주는 물을 받아 마시며 나는 어쩌면,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용과 함께하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나의 연인이었다. 연인이 맞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의 품에 얼굴을 부비고 있음에도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고개를 들어 꺼슬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는 그에게 묻곤 했다.
“정용씨, 우리 연인인거지?”
정용은 언제나 ‘그럼’이라고 답했다. 그 간결하고 정직한 대답에 나는 안심했고, 그럼 혹시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나중으로 미뤄 둔 채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로 누웠다. 그를 만지고 있지 않아도 우린 연인임이 확실했으므로.
벗은 몸에 에어컨 바람이 닿아 오돌토돌한 닭살을 만들어 내는 계절이었다. 낯선 천장과 오후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에어컨의 윙윙거리는 소리. 휴일의 격렬했던 섹스로 자극받은 음부가 화끈거렸다. 행복할 땐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인데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직 그와 보지 못한 광경이 얼마나 있을까? 정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와 열 살 이상으로 나이 차이가 난다는 것. 만화가 좋아 일본어를 공부했고, 자연스레 유학을 했다는 것. 하지만 초밥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졸업 후에는 작은 규모로 사업을 벌였다는 것. 회사가 점점 성장하자 벌어지는 이권 다툼에 치가 떨려 헐값에 넘기고 지금은 일본 기업에서 벤처기업 매니저 뭐 그런 것을 하고 있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방안이 온통 노을 색이 되었을 즈음에서야 정용은 눈을 떴고 우린 다시 정사를 나누었다. 정사 후엔 언제나 나란히 담배를 피웠다. 내가 먼저 연초 담배에 불을 붙이면 정용은 궐련형 담배를 주섬주섬 조립했다. 나는 정용의 그 모습을 좋아했다.
“사랑해 정용 씨”
나의 고백 뒤에 정용은 열심히 조립해 데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백에 대한 답은 잘 돌아오지 않는 편이었다. 언제나 애매한 언어들로 나를 아끼고 있다는 느낌만 전하거나 은근슬쩍 넘겨버리는 식이었다. 나는 그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사랑에 빠진 그의 얼굴은 어떨지 항상 궁금했다.
정용 씨, 첫사랑 얘기해줘.
첫사랑?
응. 첫사랑 있었어?
있었지.
정용 씨도 사랑을 했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아냐. 첫사랑 얘기 해줘 봐. 나 궁금해.
너무 오래됐어. 수연이가 해줘. 들을게.
내가 먼저 하면 정용 씨도 할 거야?
알겠어.
-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삼 학년 오빠를 좋아했어. 키가 아주 컸거든. 매일 아침에 학교에 가면 그 오빠가 4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려고 3층 기둥 뒤에 숨어서 한참을 기다렸어.”
“소녀였네. 그래서?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어느 날은 그 오빠가 칫솔을 들고 3층으로 내려온 거야. 치약을 빌리려는 것 같았어. 나는 얼른 교실로 가서 치약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이에 다른 애한테 치약을 받고 있었어. 학교에서 가장 예쁜 애한테. 나는 그게 너무 억울해서 수업도 못 들어가고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어. 그리고 다음 날에 치약을 잔뜩 사서 그 오빠 신발장 안에 넣어놨어. 그랬더니 문자가 오더라? 선물 고맙고, 친하게 지내자고. 그게 끝이야.”
“싱겁게 끝났네.”
“이제 정용 씨 차례야.”
“뭐가 궁금해?”
“전부 다 궁금해. 정용 씨가 사랑한 여자잖아. 이름은 뭐였어?”
“메구미.”
“메구미? 일본인이야?”
“응. 메구미 타이요오노. ”
“무슨 뜻이야?”
“은혜라는 뜻이야. 태양의 은혜”
“태양의 은혜...... 예쁜 이름이네... 얼굴도 예뻤어?”
“그냥. 평범했어.”
“평범해서 좋아했어?”
“어딘지 빛이 났어. 태양처럼. 그 애가 웃으면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았어.”
“어떻게 만났는데?”
“히비야 공원에 앉아있었는데, 메구미가 내 앞을 지나갔어. 환하게 웃으면서. 나는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가서 연락처를 물어봤지.”
“정용 씨가 번호를 땄다고?”
“응. 이상해?”
“엄청 이상해. 대체 뭐라고 말했어?”
“번호 좀 달라고 했지, 뭐.”
“일본말로 했을 거 아냐.”
“그렇지?”
“똑같이 해봐.”
“뭐 그런 걸 시켜.”
“해봐. 해줘.”
“스미마셍가 렌라쿠사키오 오시에테이 타다케마스카.”
“정용 씨 외국어 하니까 섹시하다.”
“이제 됐지?”
“아니. 더 해봐.”
“물어본 거 다 말했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나는 어쩐지 불안해져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분명히 내 옆에 있었다. 그 사실이 더 느껴지도록 몸통을 꽉 끌어안은 채 그에게 말했다.
“메구미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말해줘. 나 이렇게 눈감고 상상하면서 들을래.”
나는 주사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걸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는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떠 재촉해 볼까 하는 찰나에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겨울방학 때 그 애가 한국에 놀러 왔어. 한참을 못 봤으니까. 메구미가 오는 전날엔 잠을 거의 못 잤어. 공항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일식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 앤 한국적인 걸 먹어보고 싶댔어. 그래서 우린 순댓국집에 들어갔어. 딱 봐도 입에 안 맞아 보이는데 꾸역꾸역 그걸 다 먹더라.
한국에 왔으니 자길 한국 이름으로 불러 달래. 나는 그 앨 은혜야. 하고 불렀어. 그 앤 ‘네’ 하고 대답했어. 나도 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라, 어딜 데려가야 할까 하다가 덕수궁에 가기로 했어. 어둑어둑 해 질 즈음이었고 무척 추워서 거리엔 사람이 없었어. 은혜랑 나, 둘 뿐이었어. 그때 눈이 내렸어. 그 앤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나를 앞질러 뛰어갔어. 나는 캐리어를 끌고 뒤따라가며 그 애가 기뻐하는 걸 봤어. 갈색 떡볶이 코트에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어. 그러다 문득 은혜야, 하고 불렀는데 그 애가 뒤를 돌아보며 네! 라고 했어. 그리고 나선 환하게 웃었어.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
그건 정말 은혜였어. 은혜.”
슬며시 눈을 떠 정용을 바라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날 꿈에 나는 눈이 오는 덕수궁 돌담길에 있었다. 거기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연인 정용이 있었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 은혜가 있었다. 둘은 격렬한 섹스를 했다. 정용은 나에게 하듯, 은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은혜의 입에선 야릇한 신음이 퍼져 나왔다. 그것은 내가 도저히 낼 수 없는 종류의 소리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눈밭을 뒹굴었다. 거기엔 은혜가 내는 밝은 빛이 있었고, 내가 선 곳은 어두웠다. 두 사람이 섞여 흔들릴 때 정용은 자꾸만, 은혜야, 은혜야 하고 불렀다. 은혜가 매혹적인 목소리로 네. 하고 답하면 정용은 사랑한다고, 은혜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호>
정호는 언제나 나의 곁에 있었다. 내가 정호에게 치약을 선물한 다음 날 우리는 방과 후에 만나 함께 분식집에 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공원에 앉아 몰래 홀짝였다. 정호가 열일곱이던 나에게 술을 가르쳐 준 셈이다.
“선배 담배도 피워요?”
‘한번 피워볼래?’ 해서 처음 물어본 담배엔 그에게 잘 보이려 바른 새빨간 틴트 자국이 묻었다. 연기에 켈룩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정호는 귀엽게 바라봤다. 그는 유독 키가 컸고, 또래에 비해 어깨가 벌어져 있었고 손가락이 길쭉했다. 그런 정호를 볼 때마다 아주 작은 탄성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더는 그와 함께하지 못하게 될까봐 좋아한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정호 또한 그런 말을 꺼낼 리 없었다. 우리는 종종 방과 후에 만나 맥주를 마셨다. 그가 졸업을 하던 날에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 사온 꽃을 건네지도 못한 채 꺽꺽거렸다. 그런 나를 정호는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정호의 친구들이 다가와 둘이 사귀느냐고 웅성거리면 정호는 나와 수연은 의남매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가 정의되었다.
정호가 졸업을 한 이후에 나는 정호가 들어간 대학에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정말, 그와 같은 대학의 같은 과에 입학했다. 내가 입학할 당시 학생회장이던 정호는 살뜰히도 나를 챙겼다. 과에는 둘이 의남매다 뭐다 하지만 사실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투 섞인 가십이 낭자했지만 그 소문은 정호가 일어학과 여신으로 불리는 여자와 cc를 시작하며 일단락되었다. 정호의 연인이던 일어학과 여신은 나를 특히나 의식했다. 매일 주고받던 연락은 끊어졌고 정호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 시절 정호가 사라지자 외톨이가 된 나는 시험기간에 사탕을 건네며 다가온 귀염상의 동기와 연애를 시작했다.
정호가 군대에 가자 여신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고, 정호는 틈만 나면 나에게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어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즈음 나도 자연스럽게 연인에게 이별을 고했다. 정호의 휴가 때마다 우린 흠뻑 취하도록 함께 술을 마셨다. 정호는 이제 그만 자신에게 말을 놓으라고 했다. 정호야, 라고 불러보랬다. 나는 조심스럽게 ‘정호야’했고 정호는 흡족해 했다. 그날 나는 머리끝까지 취한 정호를 부축해 과실 소파에 뉘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정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정호는 내게 다가와 키스했다. 놀란 나는 도망치듯 집으로 가, 해가 뜰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정호에게 걸려온 수십 통의 전화를 무시했다. 받을 수 없었다. 그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수척해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정호의 제대, 정호의 졸업, 정호의 취업 또 정호의 퇴사 또 몇 번의 실연. 이후에 정호는 긴 여행을 떠났다. 추운 날에 ‘따듯해지면 돌아오겠다’고 말한 정호는 다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에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나타났다. 휴대폰 메시지엔 도무지 답이 없었고 이메일의 ‘읽음’ 표시만이 그의 생사를 확인해주었다. 본가로 보내진 소포에는 아무 메시지도 없는 풍경엽서들과 보습크림, 몇 가지 주전부리들이 전부였다.
“너 죽은 줄 알고 장례 치르느라.”
서운함이 극에 달한 나와 그걸 아는 정호의 앞에 놓인 커피는 그대로 식어 가고 있었다.
“파리에 가자마자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그랬겠지.”
“소포 보냈는데. 받았어? 서울에서 어디로 옮겼을지 몰라서 수원집으로 보냈어.”
“안 봤어. 수원에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인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미안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호가 없던 10개월 남짓의 시간. 정용을 만나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시간, 자꾸만 꿈에 나오는 은혜로 인해 신경과민과 분리불안을 얻은 시간, 정용의 집으로 들어가 하릴없이 그의 옷을 빨고 그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그게 다 정호의 탓인 것만 같았다. 정호의 탓을 하고만 싶었다.
“봄에 온다며! 날 따듯해지면 온다며! 왜 이제 와? 이메일은 읽어놓고 왜 답장을 안 해? 그 몇 개월 동안 이메일 한 통 쓸 시간이 없었어?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네가 아마존을 갔어, 북극을 갔어! 너 진짜 개새끼야.”
나의 울부짖음에 정호는 그제서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검게 탄 피부색에 반해 하얀 이가 더욱 하얗게 빛났다. 아무도 선뜻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나도 정호도 내가 폭발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호는 일어서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제야 우리는 재회의 포옹을 나눴다. 그 품은 언제나 포근한 이불과 같은 냄새가 났다. 그 이불에서라면 약 없이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냈어. 그 아저씨랑은 계속 만나? 사랑한다는 말은, 받아냈어?”
“최악으로 지냈어. 정용 씨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
“어? 바람을 피운 거야?”
“그런 셈이지.”
“에이. 장난이지?”
“정호야. 첫사랑 얘기 좀 해봐.”
내 첫사랑은 너인데. 다시 배꼽 아래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첫사랑? 갑자기?”
“응 너 일어학과 그 언니가 첫사랑인가?”
“수아? 에이... 아니야. 참,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떤 여자를 만났어.”
불안했다.
“남미로 넘어가려고 LA공항에서 경유를 하는데 어떤 일본인 여자가 게이트를 물어왔어.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나 봐. 보니까 나랑 같은 비행기인 거야. 가는 길이니 함께 가자고 했어. 한국에 꽤 관심이 많더라고. 문장 몇 개는 완벽하게 말할 줄 알았고 서울에 와 본 적이 있대. 우리는 비행기 복도에서도 한참 이야기했어. 어설픈 일본어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면서. 내 말에 웃어줄 때, 그 미소가 너무 예뻤어. 정말 그 주위가 다 밝아지는 기분이었어. 그 여잘 놓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같이 페루에 계속 머물렀어. 그냥 같이 눈을 뜨고 아침을 대충 때우고,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저녁 장을 보고 들어와서 저녁을 해 먹고,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고.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함께 보냈어. 이런 게 정말 사랑이었구나 했어. 어쩌면 첫사랑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돌아올 수가 없었어.”
그가 첫사랑일지 모를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주사 바늘 정도의 아픔일 줄 알았는데, 이번엔 해머가 날아와 팔뚝 뼈를 부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확인해야 했다. 나는 산산조각이 난 팔을 부여잡고 그에게 물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야?”
“메구미. 근데 자길 그냥 은혜라고 불러 달랬어. 메구미가 은혜라는 뜻이래.
나도 몰랐는데 그렇다더라.”
직감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알싸하게 속이 쓰려온 것이나, 정호의 연락이 왔을 때 열어 놓았던 문이 바람에 쾅 하고 닫혔을 때부터였을까. 어쩌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정호가 입을 열 수 없도록 계속 무게를 잡았어야 했다. 아니, 내가 먼저 메구미의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아니, 아니다. 내가 메구미를 오랫동안 알아 왔으며, 그녀를 품고 지금까지 씨름했다는 것을 정호가 알게 되는 것은 싫었다. 배꼽 밑에서 울렁이던 것이 목 끝까지 차올라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너 괜찮아?”
“미안. 나 가볼게.”
도망치듯 일어나 골목에서 몇 번의 헛구역질을 해 보았지만 끓는 불안은 여전했다. 따라 나온 정호가 나를 부축했다.
“수연아. 너 정말 괜찮아?”
“정호야.”
“응.”
“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내가 널?”
“응. 날 사랑하니?”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지.”
“그래?”
“응”
“그럼 오늘 나랑 있자.”
“무슨 말이야?”
“나랑 자자고.”
“너 무슨 일 있어 정말? 왜 이래.”
"싫어?”
“무슨 일 있지? 말해 빨리.”
나는 그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호는 날 따라오지 않았다. 메구미를, 은혜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메구미>
육체는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있었다. 타는 여름을 지나 다시 겨울이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었다. 관계는 말라갔으며 나는 시들어 갔다. 여전한 것은 정용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퇴근 후엔 어깨에 입을 맞춘다는 것. 목욕을 한 후엔 조용히 책을 읽다 건조한 이부자리에 누워 날 안는다는 것. 정용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올 때 즈음 그 주위로 메구미가 춤을 춘다는 것. 나는 그 아름다움을 넋 놓고 바라본다는 것. 그러면 메구미는 그 밝은 미소로 다가와 나와 정용의 사이로 들어와 눕는다는 것. 그럴 때면 나는 슬며시 비켜나 소파에 앉아 울다 지쳐 잠에 든다는 것들이었다. 꿈에서 메구미와 마주하게 된다는 것 또한 그랬다.
그날 나와 메구미는 벗은 몸으로 하얀 방에 마주 앉아있었다. 정용도 정호도 보이질 않았다. 메구미의 나체는 5월의 포도알처럼 탐스러웠다. 그 앞에서 고목처럼 야윈 몸으로 울고 있는 나를 향해 메구미는 그 은혜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 나의 메구미. 나의 연인의 첫사랑, 나의 첫사랑의 연인 메구미.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나한테 이러느냐고, 왜 내 사랑을 모두 앗아가느냐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은혜야’하고 불렀고 그녀는 ‘네’하고 답했다.
잠에서 깬 건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정용은 이미 없었고 소파에서 잠든 나에겐 이불이 덮여 있었다. 겨울의 햇살은 거실의 중턱까지 걸쳐져 있었다. 나는 부은 눈으로 인터폰을 확인했다. 정호였다. 그날 이후 정호에게서 오는 연락을 모두 피했다. 정용의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문을 열었다. 여전한 정호가 거기에 서 있었다.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 꼴은 또 왜 이렇고.”
나는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이불 냄새. 정호는 나를 토닥였다.
“경에게 네가 지내는 곳을 물어봤어. 미안”
“잘했어. 먹을 게 이것밖에 없다.” 나는 사과를 깎아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여기서 그 남자랑 같이 지내는 거야?”
“응.”
“많이 힘들어?”
“응.”
“전화는 왜 안 받아.”
“지는.”
“그땐 미안하다고 했잖아.”
“정호야.”
“응.”
“어쩐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뭐가?”
“우리말이야. 항상 이렇게 엇갈려. 나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아까 네 품에 안겼을 때 여기에서 이렇게 평생 잠들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우리 여기서 둘이 죽어버릴까. 우릴 발견한 정용 씨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겠지?”
정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사과 한 쪽을 들어 정호에게 건네고 다른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거, 사실 독사과야. 하나둘셋 하면 입에 넣고 씹어 넘기는 거야.”
“진짜일 것 같아서 못 먹겠다 야.” 정호는 사과 조각을 내려놓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렇지. 너한테는 메구미가 있으니까. 메구미를 사랑하잖아.”
“안 그래도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정호는 그렇게 말하며 혀로 입술을 훑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흘 뒤에 메구미가 한국에 오게 되었어. 그런데 낮시간이라, 내가 마중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혹시 공항에 나가 줄 수 있을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너밖에 떠오르질 않아.”
나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어째서 그러겠다고 했는지는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마주한다. 사흘 뒤였다.
-
“정용씨, 날 은혜라고 상상해봐.”
“은혜?”
“응. 은혜야 하고 불러줘.”
정용과의 정사 중이었다. 정용은 거부했고 나는 꾸준했다. 결국에 그는 은혜야 하고 나를 불렀고 나는 네 하고 반응했다. 그는 몇 번 더 불렀다. 은혜야, 은혜야.... 나는 네. 네. 하며 잠시 은혜가 되었다.
“정용 씨, 좋았어?”
“좋았지.”
“난 이제 확실히 알았어.”
“뭐를?”
“정용 씨는 은혜를 사랑해.”
“또 시작이다.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데 계속 그래.”
“확실해.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느껴보니 더 알겠어. 정용 씨 나를 은혜라고 상상하니까 훨씬 더 흥분했어.”
“아니야.”
“메구미를 사랑하지?”
“...... 그만하자.”
정용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랬다.
그날 꿈에 정용과 메구미, 그리고 정호가 나왔다. 정용과 메구미의 침대로 정호가 들어간다. 셋은 뒤섞인다. 나는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았다. 메구미가 날 발견하곤 웃어 보였다. 그녀만이 유리막 뒤에 선 나를 봐주었다. 그리고 내게 오라고 손짓하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들을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나와 메구미, 정용, 정호가 그곳에 있었다. 정용과, 정호와 메구미는 내 목구멍을 타고 걸어 내려갔다. 세 사람은 내 뼈를 꺾어 집을 짓고 살을 파서 밥을 해 먹었다. 세 사람이 평생 여기에 살 것 같았다.
위가 싸르르 아픈 아침이 불현듯 찾아왔다. 눈을 떴을 때 정호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오늘 두 시까지 인천공항으로 가주면 될 것 같아. 고마워!’
사흘이 흘렀나 보다. 정용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은 채였다. 발이 푹푹 빠지는 덕수궁의 눈길을 두 사람이 걸으므로 내가 찢어지던 사흘, 깎아놓은 사과가 바짝바짝 마르던 사흘, 응고되지 않던 사흘, 밤이 오질 않던 사흘, 웅덩이에서 순록 한 마리가 서서히 죽어가는 사흘. 머리를 흔들면 하류로 떠내려가던 것들이 역류했다.
나는 나갈 채비를 했다. 패딩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고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빨간 목도리를 둘렀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실려 가며 꼭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내 안에 사는 사람. 내 피를 마시며 살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 이제 세 사람은 내 것이었다.
궂은 날씨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언제 뜰지 모른다는 방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나는 공항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꿈속엔 어김없이 메구미가 있었다. 메구미가 입국 게이트를 나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를 본 그녀는 내게로 다가왔다. 난 꼼짝없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런 그녀는 사랑스럽지 않았다. 눈동자는 불안정했고, 바싹 야윈 채였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불안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그것은 메구미가 아니었다. 내가 마주한 사람은 시들어버린 나였다. 깨어났을 땐 정호에게 10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공항을 벗어나 택시를 잡아탔다.
“덕수궁으로 가 주세요.”
나는 돌담길을 천천히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나는 일하고 있을 정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원히 이어질 듯한 신호음이 지나가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마음이었다. 계속 그 길을 걸었다. 눈이 빗발쳤고 빠른 속도로 쌓여갔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온몸을 오갈 곳 없게 만들던 밤이었다. 거기엔 내가 있었고 메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