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얼룩
몇 달 전, 하늘에는 뿌연 재가 날아다녔다. 경민이 무릎을 붙잡은 채로 숨을 고르자 까만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꼭 쥐가 차에 밟힌 것처럼 검붉은 형체를 띄기도 했고 큰 껌이 달라붙은 모양이기도 했다. 봄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시리얼 같은 보도블록, 그리고 수로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니 한없이 많이 보였다. 이전에도 이런 게 있었나?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얼룩이었지만 아마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오래될수록 존재의 크기를 잃어버리는 법이니까. 우리 머리 위에 있는 CCTV처럼 사실 처음이 가장 거대한 법이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끝은 있으니까. 그럼에도 경민이 지은을 맞이한 순간은 모두 진심이었다. 종말을 미룬다거나, 소멸시킬 순 없겠지만 다들 그러면서 사랑을 하니까. 경민 또한 지은이 자기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수명보다 사랑이 더 길 것이라는 지은의 다짐도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선물의 법칙을 믿어. 그게 뭐냐면, 우리는 모두 이미 누군가에게 삶이라는 선물을 받은 채 살아간다는 거야. 내가 숨을 쉬고, 혼을 느끼고, 너의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미 먼저 무언가 받은 거지. 그러니 나는 돌려줘야 해. 사람이든 세상이든 사회든 어떤 것이든 나는 받은 걸 돌려줘야 해. 그게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야. 그러니까 내게 사랑이 너무 많다고 뭐라 하지 말아줘. 나는 당연한 일을 하는 거야. 그게 내 업이야.
지은은 자신의 사랑이 정당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경민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설명하는 순간,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때 언어와 함께 무언가 증발한다는 느낌을 매번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경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 웃을 뿐이었다.
지은이 사라진 다음 날, 경민은 소파에 앉아 지은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경민은 떠난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은의 행방보다 지은이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정의를 내려도 상황은 달라지지는 않는다. 경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그뿐이었다.
햇살 받으러 갈까?
어제, 경민은 지은의 말을 듣고 마음이 툭 떨어졌다. 지은은 힘들다거나, 자신이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필요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니 햇살이 필요하다는 지은의 요청은, 곧 지은의 상태가 아주 축축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경민은 머릿속으로 그날의 일정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밀린 책과 영상을 보고 평일에 마시지 못했던 술을 마시는, 그러니까 오랜만의 휴일을 어떤 감정의 기복도 없이 편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지은의 상태는 경민에게도 큰 걱정거리였다. 지은은 작업실에 가는 대신 거실 소파에 모로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경민이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집의 풍경은 늘 똑같았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지은은 소파와 한 몸이 되었다. 별로냐는 지은의 말에 경민은 싫은 내색 없이 선크림을 발라준 뒤 손을 잡고 나섰다.
경민은 차를 끌고 한강으로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지은은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짧게 이야기하며 비상구로 향했다. 어두운 계단을 오르자 지은의 밭은 숨이 경민의 살에도 젖어 들었다. 경민은 문득, 비타민 D에 대해 생각했다. 자외선이 피부에 자극을 줄 때 비타민 D가 생겨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비타민 D도 영양제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지은에게 필요할 것 같았다. 경민은 이따 집에 돌아가면 인터넷에 검색해서 가격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옥상의 우레탄 바닥은 햇살에 녹아내렸고, 경민은 그 위로 은색 돗자리를 깔았다. 둘은 돗자리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경민아
응.
나는 눈이 부실 때가 좋아.
왜?
세상이 밝아 보이잖아. 명도가 올라간 것처럼.
…….
네 슬리퍼가 눅진해지는 것도 좋아. 딱딱한 게 부드러워질 때가 난 좋더라.
경민은 지은의 손을 붙잡고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봤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비행기는 서해를 거쳐 인천 쪽으로 내려올 것이니 아마 광주나 부산에서 올라온 비행기일 것이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가 떠올랐다. 주인이 살다가 내놓은 집이라서 오래된 집치고는 컨디션이 괜찮았고, 무엇보다 근처에 인터체인지가 있어서 회사까지 단숨에 갈 수 있어 경민은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부동산 업자의 목소리가 비행기 엔진 소리에 묻혔을 때 경민은 시간을 돌려 귀를 막고 싶었다. 이곳은 공항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계약하기로 결정한 경민에게 비행기의 존재는 신발 속 모래알처럼 불편한 동행이 지속될 게 뻔히 보였다.
경민은 계약금을 넣고 돌아가는 길에 혹시 비행기 소리를 들었는지, 자기 생각에는 너무 크게 느껴졌는데 어땠는지 지은에게 물었다. 그러자 지은은 경민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구름이 지나가고, 새가 날아가는 것을 우리가 매 순간 인식하며 살지는 않잖아.
경민은 선글라스를 낀 채 고개를 돌려 지은을 바라봤다. 그때의 지은과 지금의 지은은 같지만 달랐다. 달랐지만, 또 결국 같기도 했다. 지은이 요즘 무언가를 의식하는지 경민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꽤 오래도록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을 처음 만났을 때 경민은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지금은 입구부터 잘못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자주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은은 돗자리에서 일어나 경민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너무 덥다는 말과 함께 옥상 끝에 있는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경민은 눈을 껌뻑거리며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숨을 몇 번 내쉬고 잡지와 맥주잔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돗자리를 걷었는데, 바닥에 검붉은 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기분 나쁜 색깔이었고, 그것은 몹시 축축해보였다. 돗자리 뒷면을 보자, 꼭 오디나 버찌가 터진 것처럼 검붉은 색이 물들어있었다. 경민은 원래부터 있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돗자리에 물든 얼룩을 지워내는 게 우선이었기에 금방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다.
경민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돗자리를 물로 씻어냈다. 끈적한 알갱이가 붙어 있어 잘 떼지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경민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씩씩대며 돗자리를 쓰레기통에 넣고, 버려도 되는 돗자리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지은은 집 안에 없었다. 경민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소파에 앉았고, 곧이어 옆자리에서 조그마한 그늘색 얼룩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