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그와 이영에게는 불사르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 중 유난히 잘 타는 것은 그의 얼굴에서 갓 캐낸 싱싱한 피지였다. 피지는 죽도 밥도 없이, 심지어는 씻겨도 줄 필요도 없이 잘만 자라났는데, 그들 사이에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것만큼 불에 잘 타는 게 없더라. 그들은 피지를 사납게 짜내고 비명을 ‘악’하고 지른 다음 불을 붙여 침대맡으로 던져버리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덕분에 둘은 산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은 삼키지 못할 것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이영은 만성 소화불량이라 자신의 서랍장 한 칸을 모조리 소화제로 채워 두었던 것이다. 이영이 떠난 뒤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그는 남은 짐을 택배로 보내려 서랍장을 열었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한 알 한 알 껍질 벗겨 양손 가득 모은 다음, 모조리 삼켜버렸다. 그제야 그의 속은 시원하게 풀렸다. 마치 그들이 펑크린을 여섯 병이나 부었다가 결국 14만원이나 주고 고쳐야했던 싱크대처럼 정말이지 시원하게. 그 즈음 이영에게서 편지들이 돌아왔다.
그는 내게 이 편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알고 보니 이영은 이름도, 나이도 속였다. 이영은 이제 불놀이도 외롭다며 떠났다. 그는 편지를 두고 자기 손으로 쓴 거라 역시 불사르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편지들을 내게 넘겨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편지들이다.
2023
네 말 대로 어쩌면 이곳은 우리의 최악의 우주인지도 모른다. 헤어짐을 말하게 되었으니. 나는 살과 삶이 겹치고 겹쳐 짓무른 그곳. 떨리는 그곳을 들여다 본다. 그때에 먹었던 러시아 케이크 같은 첩첩 단면을 들여다 본다. 그곳에서 뉴질랜드의 어딘가를 함께 거니는 우리를 보고, 집을 청소하는 우리를 보고, 페이를 보고, 수영하는 우리를 보고, 매트리스를 찢는 우리를 보고, 단지 주파수로만 존재하는 우리를 보고, 몸이 붙은 샴 우리를 보다가, 기어코 뒤돌아 누운 너를 꼭 안고 자는 나를 보고야 만다. 만고의 시간을 나는 그 모든 곳을 보며 간절히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나는 이곳이 최악의 우주임을 깨닫는다.
내내 울다가 바닥을 보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너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속에 있었다. J의 작업실로 오르는 계단 즘일까. 담배 연기를 내쉬며 너는 내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시답지 않은 말로 네 앞에 서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너의 삶을 사랑한다고, 아니 이 말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더 지난 뒤 각자 무언가 되어 어디선가 먼 발치로 마주선 채 서로를 대견해 할 만남도 그렸다.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고 물었지.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이란 말은 모든 것의 중첩이야. 너와의 모든 생과 모든 말과 모든 몸짓의 러시아 케이크야. 이게 내가 알게 된 사랑이야.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한대도 그건 언제나 다른 생과의 중첩일 터이고. 그렇기에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언제고 그 사이에서만 사랑으로 있어. 먹어버리고, 치워버리려 해도 그건 모든 것의 중첩이기에 사라지지 않아. 그 말에 겹친 우리의 생을 지워낼 수 없고, 그러니까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실은 함께 라면 어디서 무엇이 되었든 모두 좋았을 거란 걸 안다. 이곳. 지금 이곳조차도 나는 사랑할 수 있어.
파동에 대한 말을 덧붙이고 싶어. 네게 그저 두 파동이 만나 떨리며 빗발치다가, 각자의 고유한 파동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라 말했지. 정말 그런 게 있더라. 파동중첩. 동일한 두 개의 파동이 만났을 때 두 파동이 겹치며 진폭이 커지고 중첩 후 각 파동은 원래대로 진행하게 된다. 현실의 파동은 동일한 것도 다른 것도 없어서 중첩은 불완전하고, 그들이 다시 나아갈 땐 이전과 다른 곳으로 진행한다. 그 파장은 때로 배로 늘어 난다. 네가 외로웠던 것은 홀로 서지 못해서도, 불완전해서도 아닌 거야. 그러니 우이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네가 영원을 찾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고 출발하고 있는 존재이니까. 영원은 나아감에 있어. 사랑은 또한 모든 것이기에, 시간이 지난다 해도 변하지 않아. 사랑해.
2022
“소리. 이곳에선 소리가 들려. 우우우웅 으으으웅. 분명 가까운 곳에선 대단히 다채로운 색깔이지만 여기서는 모두 하나가 되어 그냥, 떨리고 있어요. 떨림만 있을 뿐입니다. 긴 밤이 되겠네요. 왼쪽 하늘을 좀 보세요.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어요. 떨어지고 있어요. 그래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래서 이제 울지 않을 것만 같아요. 하아. 정확한 말로 정할, 전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말이라는 건. 정확한 말로 전하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그 시간으로 전해지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정확한 말을 찾지 말고 더 많이 이야기를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달될 때까지, 마음이 전해질 때까지 그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에요. 아주 오래, 아주 오래. 도시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이야기는 가까이서 들을 때는 시끄럽고 더러운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듣고 있으면 그 내용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이 웅성거림으로 그 무수한 존재들이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아니 그것 만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그 무수한 말이 그 모든 것이 압축된 이 시간의 말이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임을 알아요. 그 모든 중첩된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이 도시의 의미를 듣습니다. 이 이 도시의 사랑을 듣습니다. 이것은 사람 사람 사람의 소리예요. 이영. 듣고 있어요? ”
2021
‘변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나는 틀 조차 없이 이 작은 방 바닥에 놓인 슈퍼 싱글 사이즈의 매트리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것은 너도 알다시피 이미 10년도 더 되게 쓴 물건인데, 처음 그 위에 누웠을 때는 두 바퀴도 구를 만 했다. 그 뒤로 수년간 그 위에서 온 몸을 흘려 내렸다. 벗겨진 것들, 흐른 것들, 빠진 것들, 뽑힌 것들, 묻은 것들. 잊고자 한 것들. 철골들 사이에는 지금의 나보다도 더 나 자신 같은 침전물이 쌓여갔다. 가끔은 잠결에 등 아래서 태동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어느 날부터 그 위에 한 사람이 더 누워있게 되었다. 이미 커버린 이영과 나 둘이 누워서는 구를 수가 없었다. 구겨진 몸들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들이 녹아 내렸다. 두 몸에서 나온 진액이 섞여 그 안의 것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했고, 세차게 꿈틀거렸다. 이 모든 게 침대가 좁다고 불평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너를 만나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매트리스만은 바꾸지 않았다. 사랑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 진다면 매트리스를 찢어보자. 그 안에 사랑한 모든 것들이 살아 숨쉬고 테니.
2020
많은 밤들이 지났어. 너는 내 코고는 소리에도 잠을 잘도 잤더라 했지. 점점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바래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분명 같이 가고 있다는 걸 안다. 버스를 타고 아주 어두운 침엽수 숲을 지나가는 꿈을 꾸었단 이야기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있었고, 한 여자가 미친듯이 마구 삿대질을 하고 소리쳐 댔지. 터널이 다가왔고,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어. 동행이 있었음에도 나는 홀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깨어나서 이영이 해놓고 간 카레를 먹다 생각 했다. 이영과 그 버스에서 내려 그 울창한 침엽수림을 걷는 거야. 발바닥에 닿는 이끼는 아주 부드럽고, 폐에 가 닿는 안개비의 기분 좋은 서늘함. 그 부드러움과 서늘함에 지치지도 않고 발병도 없이 내리 천리를 걸어. 도착할 곳이 어딘 지는 몰라. 아마도 숲은 생각과는 다른 곳이겠지. 그러다 나무들, 짙고 어두운 것들의 이름을 짓게 될지도 모르지. 이름을 지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될 거야.
시들에 시간을 담아 보낸다. 문득 펼친 면들이야. 곁에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 백 편을 적었지. 하루에 하나를 적었으니 매년 하나씩 꺼내 창문에 걸어 둔다면 어디에서든 우리의 해와 일이 만나게 될 거야. 그날 밤이 그랬고 또 그날의 밤이 그랬듯 텅 빈 곳은 어디에도 없었어. 네가 태어난 이래로 모든 것이 그랬어. 생일축하해.
얼마 전에는 네 오른쪽 귀 뒤에 새로 난 점을 보았어. 잠든 사이에 그것들을 선으로 이어본다. 난 어쩌면 네가 모를 점들도 많이 알고 있지. 이영아. 점은 그곳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이 바다에 있는 순간도 점이지. 살아간다면 점들은 선이 되고, 그 선들이 만나 한바탕 춤을 추는 거야. 나는 너의 구두점 같던 마음을 저 파도에 발 담그듯이 기억해. 그러니 너와 네가 여기에 있었음을 기억해줘. 정신 없는 삶에도 우리는 만나 점을 찍자.
너에게 우리가 한달 정도의 시간,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사는 걸지도 모른다 한 적이 있지. 매일 더 일찍 일어나고, 보고싶기도 전에 보고 싶어서 그 간격을 메우고 싶다고. 나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 너의 생을 볼 수 있는 시간에 있을게.
2019
우리의 사랑이 너에게 불안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너의 눈을 보았어. 나는 어두운 날 빗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낯선 도시를 배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 누우니 지금 네 눈이 고등어의 등의 파란색은 아닐까, 그래서 곧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는 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사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면 그건 거짓말인 것 같다. 내게 떠오르는 것은 단지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너무 작은 것 같기 때문이다. 네가 곁에서 자던 어느 날 밤엔 텅 빈 공간에 혼자 앉아있었다. 별들은 아주 멀어서 평면적으로 보였고, 가만히 있으니 그것들이 그려진 천막 안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같이 걷던 오키나와의 밤에는, 곁에 있음에도 조용한 목소리로 너와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창에 비칠 때까지 너와 말하다 잠에 들면 햇살이 네 목소리의 잔향처럼 감은 눈 위로 비쳐, 잠드는 순간까지도 따뜻할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생경한 외로움 같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말로 담지 못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서 하는 말들이었다. 사랑. 나는 그냥 노래를 했다.
이제는 나를, 우리들을 묶어주던 어린 경계가 무너져버렸다. 무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다. 말하자면 물에 젖은 종이장이라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된 느낌이고, 그게 너를 불안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곤죽이 된 느낌을 더욱 절실히 맡는다. 장마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흙탕물 냄새. 그런 나를 누군가는 푸르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아서 결국 끔찍이 두려운 오해(海)로 잠긴다.
네 곁에서 나는 파랗지 않아도 좋다. 아니 색이 없었으면. 빛이 바래 버린 유리 조각 같은 걸로 네 방 한 켠의 보석함에 담겨있고 싶다. 눈이 편한 부연 투명색으로, 다 닳아서 날카롭지도 않은. 나는 이제 씻으려고 한다. 네가 이 글을 보고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 거니까.
2018
처음 만났을 때, 이영은 내게 너울 파도들 사이의 잔잔한(Chappy)한 파도 같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그 순간 내가 정말 파도가 된 것 같았다. 고마운 말이었다. 나는 새벽에 홀로 파도에 뛰어들어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렸다. 잔잔한 파도는 아니었지. 덜덜 떨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뛰어들었다. 요즘 이영의 글들을 읽는다. 나는 남의 글을 잘 읽지 못하는데, 그의 글은 금새 읽었다. 방의 불빛이 아늑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린 더 돈독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수난을 겪느라 비참한 슬픔을 겪는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미지근하고 짙은 안개 속에서 몸이 완전히 젖어버리듯이 지치곤 한다. 깨어나면 매트리스가 온통 땀으로 흥건하다. 그래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무어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영이 위로해주어서 정말로 그 손을 잡고 싶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산에 불을 지르고는, 그를 대신하여 편지를 태워버렸다. 이 정도의 불이라면 이영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