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원피스
J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J는 나의 우울증 메이트였다. 그는 자주 '이 우울증을 같이 이겨내보자'고 했다. 또 종종 '괜찮아져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럴 때면 전국 각지에서 친구들을 사귀고는 그들의 눈썹 사진을 모아왔다. 눈썹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또 그 사람의 모든 감정을 담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눈썹을 찍는 게 편하다고 했다. 언젠가는 '이번엔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몇 년이 걸리든 끝까지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맘때쯤 J는 기분이 나아지는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주곤 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더라, 하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참 오랜 기간에 거쳐 나에게 건넬 수 있는 모든 말을 마치고 J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J는 꼭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치료받겠단 말도 모두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동시에 죽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진짜였다. J는 죽으려고 뛰어내린 게 아니었다. 다만 오래도록 묵혀온 진심을 토해내며, 그토록 오래 갈망했던 해방의 순간을 드디어 다짐하며, 감정이 한껏 고조되었다. 한 줌의 희망이 찰나의 감정에 의해 비현실적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를 둘러싼 숱한 감각 역시 현실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저 꿈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그랬을 것이다. J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J가 죽기 전, 그와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한 줌의 희망을 가졌다. J처럼 나도 치료를 해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J처럼 훌쩍 떠날 용기도, 정신과나 상담을 다닐 여력도, 집을 벗어날 동력도 없었다. 늘 나를 살게 하는 건 J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나, 웃음을 구경하는 것이나, 그에게 이끌려 어디든 가는 것 그뿐이었다. J는 지금쯤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있으려나, 또 훌쩍 바다를 보러 떠났을까, 빈속에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과식을 했을까, 아니면 새로운 동거인을 들였을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두 달 만에 세상으로 나왔을 때 처음 방문한 곳이 J의 집이었다. J의 집은 온통 꽃다발로 채워져 있었다. J가 죽었다고 했다.
나는 알지. 죽어야 할 것만 같은 그 기분을 알지.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당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 그 기분을 내가 알지. ⋯ 그게 나였으니까.
"새벽은 위험해. 또 울면서 깼잖아." 언젠가 J가 말했다. 내가 울면서 깨면 J는 늘 옅은 미소를 띠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게 참 나를 안심시켰다.
"나 꿈을 꿨어."
"그래."
"꼭 죽어야 할 것 같은 기분, 꼭 뛰어내려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어."
"괜찮아. 우린 마지막 순간에 항상 살아남았잖아. 이번엔 진짜 같아도 우린 꼭 살아남을 거 야."
"우울에서 온 기분이 아니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뛰어내린 거야."
"그래서 새벽이 위험하다는 거야. 새벽은 뭐든 가능하게 만들잖아. 오늘은 밤에 자서 아침에 일어나자."
"응." 내가 말했다.
항상 마지막 순간에 살아남던 J. 위험한 새벽에도 현실을 끝내 구분해내던 J. J는 친구를 사귀지도, 바다에 가지도,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J가 뛰어내린 순간이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까. 뛰어내리기 전날 J는 밤에 자서 아침에 일어났을까.
J는 노란색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을 때면 꼭 파란색 속옷을 입었다. 나의 우울을 이따위 밝은색으로 감출 수 있다는 게 좋아. 또 보라색 속옷을 입었다. 나의 허영심을 산뜻 발랄함으로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또 빨간색 속옷을 입었다. 나의 열망을 들키지 않게 가리는 중. 어때? 오늘의 나는 어때 보여? 내 팬티 무슨 색이게? J는 형형색색의 속옷을 입으며 꼭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우스꽝스럽게 의미 부여를 했다. 우리는 어쩌면 노란 원피스에 가려진 이야기들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더 살아낸 건지도 모르겠다.
J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때, J에게는 더 이상 입고 싶은 어떤 색의 속옷도 없었을까. 어떠한 색깔도 살아낼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아니면 드디어 노란 원피스를 벗을 용기가 났을 때, 또다시 노란 원피스를 입고 싶지는 않아졌을까. 그래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자신을 내던진 걸까.
J의 노란 원피스와 그가 모아둔 눈썹 사진과 그의 유난했던 웃음. J와 J의 노란 원피스가 나란히 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