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와 호
호: 나는 장거리연애를 하고 있지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초반에 시간과 애정을 깊이 투자해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장거리로 인해 채우지 못하는 것도 분명 있고 유지하지 못하는 애정선도 있어! 아직 희에게는 서로에게 몰입해서 그걸 쌓아가야 하는 시기 같은데, 곧 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랑이 이 상황을 집중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어려웠어.
희: 네가 그런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한 건 어떤 지점이었어?
호: 충분한 시간과 이야기가 쌓였다는 생각. 서로에게 몰입해서 엄청나게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준점과 방식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쳤어.
희: 나도 그런 시간과 대화가 떠나기 전에 충분히 필요하다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과 의지가 다른 것 같다. 그런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건데, 랑의 상태와 마음을 잘 모르겠는 채로 계속 기다리고 불안해하며 스트레스 받는 시간이 오래되니까 끌어낸 마음이 소진됐어. 어제는 도무지 더 이야기할 에너지도 없고 어떤 이야기를 해나가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한테 참지 않고 다양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며 조율해나갈 수 있는 관계의 모델링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네가 관계 안에서 그런 질문과 마음들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
호: 근데 진짜 상태를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기다림이나 공백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잖아. 진짜 만나서 수십 시간 동안 이야기해야만 되는 것들인데, 랑이 자기 상황을 희한테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희는 이런 마음일 수 있겠다’ 하는 게 상상되어야 하는데.
(몇 분 뒤)
호: 처음에는 랑의 돌봄이나 다정함, 챙김에 대해 이야기 들었던 것 같은데 되게 다르다. 다정함이 감정의 섬세한 터치는 아닌 걸까.
희: 음 잘 모르겠는데, 랑이 같이 하자고 이야기했던 것들, 이렇게 해주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 계속 미뤄지고 기다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런 말을 함으로써 기대됐던 부분들에 대해 실망하고 서운했어. 랑이 그런 말들에 대해 책임지고 실행할 힘이 없다고 느껴. 뭔가 밀접한 관계 안에서 책임을 부여받는 것, 관계에 책임을 지는 것이 싫고 부담스럽다 느끼는 건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랑을 모르겠다.
호: 무언가 하자고 했을 때 그것을 진짜로 하자는 사람이 있고 말로 표현만 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하자라는 시간의 범위가 각자 다르니까. 서로가 어떤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까, 진짜 지키고 싶어서 한 말인지 구체적인 범위 등- 알아야겠다. 원하는 방향과 정도에 대한 것이 다르면 그걸 이야기할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데, 희가 떠나기 전 지금만 할 수 있고 해놔야 하는 건데 그의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 안타깝다. 타지에 가면 너무 낯선 환경들이라 이런 마음들 챙기기 너무 어려울 거잖아. 낯선 환경, 그 이후도 상상해보고 우리가 어떨지, 어떻게 달라질지 이런 이야기들을 해두면 좋겠다. 상상하면서 우리가 어떤 관계, 어떤 노력을 통해 관계를 이어갈 건지도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거고.
나는 어떤 다양한 대안에 대해 사회적 규범과 달라도 모든 상상을 해보고 들었던 생각을 애인과 나누는데, 돌이켜보니 확신이 있고 상대방이 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말하는 것 같기도 해. 내가 하는 말로 인해 불안해하는 사람이면 내가 불안하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희: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됐을까?
호: 시간? 그리고 엄청 솔직한 대화. 나 초반에 되게 많이 투정 부린 것 같아. 진짜 짜증이 많이 났었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것에 설명할 수 없이 그냥 짜증이 났어. 잘 토라지고.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대로 짜증이 나고, 이것에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 내가 짜증 나는 거야. 아니 뭐 이게 뭐라고 내 감정이 이것 때문에. 못난 모습이면 내가 왜 이 사람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지 스스로에게 가장 화가 많이 났어.
희: 와 너도 그런 시간이 있었구나? 상상이 안 된다. 신기해. 너는 그럴 때 어떻게 그 감정들을 다루고 대화했어?
호: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간을 갖고 얘기했어. 한 마디씩, 한 글자씩.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어. 붙잡아 주길 원하면서 집에 가겠다 돌아서기도 하고. 그런데 집에 간다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일단 붙잡아둬. 말이 안 나와도 붙잡아. 일단 전하긴 해야 하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달라는 손짓과 몸짓.. 말이 어려우면 옆자리에 앉아서 카톡도 하고, 메모장도 보여주고, 쪽지도 써보고 그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희가 쓴 일기를 보고서)
호: 폴리아모리를 하는 홍승은 작가도 한 사람과의 독점 연애를 시작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난 거잖아. 그러니까 어쨌든 처음 관계가 있었던 거고 그게 신뢰가 쌓여야 하는 거니까.
(희는 랑에게 일기를 보여주고, 랑은 희에게 텍스트 편지를 보냈다.)
호: 글에는 감정이 배제되니까. 사람의 목소리와 억양에 묻은 힘듦을 배제된 채 봐서 랑의 반응이 미지근했던 걸까. 나라면 너에게 전화를 했을 텐데. 그런데 랑이 선택한 최선의 표현이고 최선의 사랑을 보여준 걸 수도 있겠다.
(몇 분 뒤)
호: 솔직함이 관계에서 엄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초반에는 질투를 느낄 때가 있었는데 그걸 다 솔직하게 서로 얘기했었어. 지금은 질투를 사랑으로도 느끼게 되고, 응원으로도 느껴. 그리고 이야기하고 나면 이게 질투가 아니라 다른 감정임을 알아. 그러니까 이게 뭉뚱그려서 나는 이게 되게 속상하고 질투라는 감정이었다고 느꼈는데, 내가 왜 이랬을까를 얘기해 보면서 질투보다는 나의 문제로 풀어갈 때도 있고. 다른 상황에서는 안 그랬을까 생각도 해보고, 다른 답들을 찾아가.
그러면 처음에는 그 사람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부했던 것들이 다음에는 가능해지기도 해. 그 감정이 계속 해소되면서 나아가지는 거지. 나중에 다시 그런 상황이 반복될 때 나는 다른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해. 왜냐면 이미 우리가 나눴던 얘기고 이미 우리가 같이 느꼈고 아는 감정이니까.
희: 맞아 이런 게 궁금했어. 나는 도저히 이런 것을 전하지도 않아 놓고 어떻게 다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패턴을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호는 이런 감정들이 들 때 그걸 어떤 방식으로 전하고 해소해?
호: 아까 말했듯이 솔직하게 대화하기. 진짜 말 안 하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가만히 있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게 끝일 순 없으니까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근데 이런 게 가능하다고 느끼는 게 되는 건 상대방의 반응 때문인 것 같아. 이런 감정과 갈등으로는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 어떤 이야기든 꺼낼 수 있는 거고. 이 사람이 이걸 받아줄 거라는 걸 알았을 때 할 수 있는 투정이고. 내가 이런 말까지 해도 이 사람이 이걸 오해하지 않고 왜곡해 듣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그래서 애인 앞에서 제일 애가 돼. 제일 솔직하고 편하고, 어린아이가 될 때가 있어.
(몇 분 뒤)
호: 우리가 그런 걸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다. 무엇을 정상 연애라고 생각하고. 지금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왜 감정을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지. 희가 여기 그렇게 썼잖아. 더 함께 있고 싶다고 요구하기 어려웠다는 감정. 근데 이건 정상 연애 규범이 아닐 수도 있잖아. 상대방이 시간을 내어줬으면 좋겠는 마음을 정상 연애라 할 수 없잖아.
애정의 문제일 수도 있을까? 지금 애인이 전 애인과 했던 것 중 정상 연애라 느끼고 가치와 달라서 싫다고 했던 것들을 지금 나와 하는 것들이 있거든. 어떤 바탕으로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기도 하겠다.
호: 궁금하다. 지금 1만큼의 데미지를 참았어. 근데 또 어떤 상황이 와서 1의 데미지를 더 참았어. 이게 쌓여서 2가 돼 아니면 그냥 다 잊고 1로 되게 만드는 편이야?
희: 쌓이는 것 같아.
호: 그럼 힘들겠다. 1일 때 그걸 이야기하면 1은 사라지잖아. 쌓이면 내가 마주할 수 있는 타격이 정해져 있는데, 총량을 넘어서는 일로 가니까. 계속 쪼개 가지고 풀고 쌓인 1을 0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 필요하겠다.
희: 진짜 솔직하게, 내가 괴로운 거나 부정적일 때 그 모든 것을 드러내거나 요구해본 경험이 없었구나 이 생각을 했어.
호: 좋은 것도 그래?
희: 좋은 것은 솔직히 말하지. 근데 그러니까 내가 부정적이라 여기는 영역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못 하는 거야. 호는 내가 모임하고 이러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 있어?
호: 아니 다른 데서 볼 때는 진짜 안 그런 것 같아. 솔직하다고도 느껴. 열려 있는 사람.
희: 그러니까. 내가 좋다 생각하고 이것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는 것들은 표현하는데 그럴 거라는 자신이 없거나 내 스스로도 부정적이라 여기는 것들은 그냥 꽁꽁 숨기려고 해.
호: 그럼 희가 하지 못한 말들은? 다 기억나?
희: 응 계속 생각해. 만약에 그 말을 못했거나 이러잖아? 그럼 다른 것을 하다가도 계속 불쑥불쑥 스트레스 받는 그것들을 계속 떠올려. 나는 계속 한 번 스트레스 받기 시작하면 이걸 계속 곱씹고 정돈되는 데까지 생각하니까. 나는 계속 랑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생각하고 스트레스 받고 있었어.
호: 고민을 말한다는 거는 상대방한테 던지는 일이라고 느끼거든. 왜냐하면 이제 내가 할 만큼 하고 말했을 때는 상대방이 고민해야 하는 차례잖아. 근데 희가 그 차례를 계속 안 주고 있는 거 같아. 약간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 “내가 뭔데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까지 알 수 있겠어?”(농담) 그렇게 생각하고 끊어내는 거지.
희 같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한테 적어도 3번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처음은 상대방을 배려하며 하는 거절, 두 번째는 나의 감정도 들여다보고 거절, 세 번째 질문에는 솔직할 수 있는 용기 갖는 시간.
(무언가를 보고서)
호: 화나! 뭐야! 왜 갑자기 또 희의 감정을 추측하는 걸까. 만약 서로 연애의 기준이 다르다면 내가 생각한 관계는 거기까지는 아니었고- 나는 연애에서 어떤 걸 원했고 이런 얘기를 하고 기준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희가 속상해하는 지점들이 계속 부딪혀서 서운하잖아. 그럼 희는 랑의 조건에서 어떤 것은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희: 이야기하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마음, 먹어야 하는 마음. 존재를 세우는 일처럼 마음을 세워두는 안전 장치를 만들어야겠다.
희는 호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모든 것을 공유하고 기대는 것, 사랑과 우정을 가르면서 얼마큼 책임질 것인지, 얼마나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그 마음의 차이라 했다. 또 사랑이라 느끼는 것은 편안함,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무엇도 재지 않고 전화하고 싶을 때 전화할 수 있는 것, 어떤 계산도 필요 없는 관계라고 했다. 의지하고 기댈 수 있어서, 내가 그에게 좋은 사람이고 그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어서 이 관계가 사랑이라고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