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교사의 삶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린이들과 함께 보내는 대안학교 교사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어떻게 교사로 함께 하게 되었더라 질문하다 예전에 볍씨학교 교사지원서로 쓴 자기소개서를 발견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까.
공동체에서 나는 ‘호기심이 많고 기획력이 좋지만 끈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조금만 더 넘어가면 좋겠는데, 그걸 안 넘어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다가도, 100일 정도를 하고 나면 ‘충분히 했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삶의 정수를 제대로 살아보고 싶지만, 진지하게 내 삶을 직면하는 게 아직도 어렵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질문을 따라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그냥 적당히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을 탐구해보고 싶다. ‘내 사랑아, 지금 나는 어디 있느냐’
지리산에서의 생활은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지루함과 단조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곳이 최종 정착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지금 내가 배워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
탁마*의 시간을 갖고 싶다. 볍씨학교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마침, 교사를 모집한다고 했다. ‘늘 나에게 마땅히 필요한 일이 일어난다’라고 믿는 나로서는, 이 선물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실은 어린이들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은 법씨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다만 내 삶이 던져주는 질문을 진지하게 탐구해보고 싶었다. 이 글을 읽은 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탁마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는가'라고.
나를 이만큼 키워낸 것은, 8할이 볍씨 교사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볍씨 선생님들은 서로의 영적 성숙을 든든히 지지한다.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존재에 대한 질문을 깊게 던진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교사로 합류한 첫 해 참여한 연수에서는, 새벽녘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내 존재에 오롯이 집중해주던 선생님들에게 끝없는 물음을 토해냈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끊임없이 스스로를 못마땅해했고, 부족한 내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해주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내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일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한쪽으로 치워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잘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자꾸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하고 내 것으로 훅 가져가지 않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이 패턴은 지난 4년간 내가 반복적으로 보였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최악이라고 생각될 때도 이전처럼 바닥을 찍지 않는다. 나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거나,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상태가 될 때, '아, 내가 스트레스가 많아서 불건강한 상태에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전환이 바로 되지 않을 때도 많다.) 요즘은 학기 초라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지 해야 할 거리들에 묻혀 내 마음도 다른 이들의 마음도 제대로 보지 못할 때도 있고,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며 짜증을 낼 때도 있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 못마땅해서 속상해하며 엉영 울기도 한다. 그러다가 동료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또 같은 지점에 서 걸려 넘어졌네'하고 민망해하며 내 모습을 바라본다.
어린이들과의 만남도,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한다. 얼마 전에는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 어린이에게 크게 화를 낸 일이 있었다.
놀러 나가려는 OO이를 붙잡았다. 셈 시간 필기를 하다 만 것을 친구 것을 보고 제대로 하라고 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그이에게 설명해주려고 하는데 그이는 놀러가는 것을 막은 깐깐한 교사가 짜증나고 답답하다. 같이 놀기로 한 친구가 와서 재촉하자 그이는 더욱 화가 난다. 교사가 보라는 듯 그이는 볼펜을 부러뜨린다. 교사는 잠시 망설인다.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은 알겠지만 폭력적인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싶다. 교사는 아주 크게 화를 낸다. 교사도 그이도 놀란다. 하지만 둘 다 자리를 뜨지는 않는다. 교사가 어떤 마음에서 화를 냈는지 설명한다. 그래도 화낸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그이도 볼펜을 부러뜨려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이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이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지만 마음은 나아졌다고 한다.
교사는 화가 몸에 남아 집에 돌아와서도 몸이 떨린다. 교사는 이렇게 깐깐한 교사이고 싶지가 않다. 미움받고 싶지가 않다. 사랑받고 싶다. 교사는 속상하다. 어린이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자신이 없다. 다음날 교사는 그이를 따로 부른다. 어제의 상황과 마음을 다시 한번 설명한다. 그리고 너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미안했다고 얘기한다. 정말로, 너무 미안했다.
어린이들의 삶에 얼마만큼 개입해야 할지, 내가 하는 개입이 최선일지, 순간순간 고민된다. 하지만 살아오며 타인의 삶에 개입하기 보다는 물러나기를 선택했던 나이기에, 옴팡 개입해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때때로, 이것이 최선의 결과를 낳지 않을 때도 있다. 교사인 나도 인간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라, 나의 격정에 휩싸여 잘못된 개입을 하고, 꽤 오랜 시간 마음을 복닥거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과 상대의 영적 성숙을 위해 자아를 확장해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을 해보고 있다. 어린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대안교육은, 서로의 성숙을 위해 저마다를 뻗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교육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것에 너무나도 서투른 나이지만,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싶은 것도, 대안학교 교사로 몇 년을 살아본 덕택일 것이다.
* ‘절차탁마’의 줄인 말,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도움으로 자신을 직면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를 통해서 성숙하는 것이었다.
** 벨 훅스, “사랑에 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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