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얼굴
모르는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어쩌면 전부일 안부를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
‘어떤 고통도 없는 삶’은 미덥지도 않고 그렇게 바람직한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어떤 고통도 외롭지 않은 세상’을 기도해 봅니다. 그야말로 전부인 안부지요.
오늘은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게 시의 얼굴을 전해볼까 합니다.
글이 끝날 때쯤 당신이 노란 나비 한 마리를 떠올리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는 편지입니다.
저는 시와 늦게 만나 깊게 사랑하는 중입니다. 짝사랑이지만 외롭지 않은 사랑입니다.
저에게 시의 첫인상은 전지전능이었습니다.
시는 사막에 비를 내리게 하고, 여름에 눈이 내리게 하고,
죽은 나무로 트럼펫을 만들어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세상의 슬픔을 그러모아 눈부신 불꽃놀이를 벌이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한동안 신을 길게 발음해 시인이라고 부르고,
시인을 짧게 발음해 신이라고 부르는, 유치한 말장난을 남몰래 즐겼습니다.
그런데 시는 얼굴이 없더군요.
사막을 걸을 발도 없고, 눈을 뭉칠 손도 없고,
교향곡을 들을 귀도 없고, 불꽃놀이를 볼 눈도 없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있다, 라고 말하려면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는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겠더군요.
왜냐하면 시는
A : 죽음에 관한 그림이에요.
B : 뭐라고요?
A : 위협이라고요. 이건 죽음에 관한 거예요.
B : 이건 그냥 멋진 배잖아요. 주위에 근사한 해변이 있고 날씨도 좋고요.
A : 저 배에서 삶이 느껴져요?
B : 아뇨.
A : 삶의 반대가 뭐죠?
B : 죽음이요, 하지만…
A : 핵폭탄이 터진 걸까요?
B : 배 안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죠.
A : 우리는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B : 우리는 살아 있어요. 당신 세계관은 조금 비관적이에요.
A : 내가요? 증명해봐요.
B : 뭘 증명해요?
A :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거요.
B : 좋아요.
B, 천천히 다가가 A에게 입을 맞춘다.
(Victor Levin, <5 to 7>, 2015)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입술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에 시가 저를 움직였습니다.
몸이 없는 시가 저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마치 A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 B처럼요.
그날 저는 159개의 영정 앞에, 159개의 이름 앞에 있었습니다 - 2022년 10월 29일 이후 ‘159(백오십구)’는 더 이상 158보다 크고 160보다 작은 자연수가 아니더군요. 그날 저는 시인을 통해 그곳에 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저를 밀거나 흔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곳에는 기록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기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눈을 감고, 서로의 체온을 느꼈습니다. 슬픔과 슬픔이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몸이 움직였습니다. 아주 조금씩, 매우 느리게,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당연하게도 움직임은 운동이고, 운동은 에너지입니다. 그러니까 시는
Ek = 1/2mv2
여기 어딘가에 있을까요.
멀어 보이지만 어떻게든 연결될 수밖에 없는, 연결되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시를 쓰는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날 시인은 304개의 영정 앞에, 304개의 이름 앞에 있었습니다 - 역시 2014년 4월 16일 이후 ’304(삼백사)‘는 더 이상 303보다 크고 305보다 작은 자연수가 아니더군요. 그날 그곳에도 기록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기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꽃을 놓고,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없어진 사람은 시인이 아닌 평론가였고, 선생님의 선생님이었다고 하더군요. 분향을 마친 시인은 서둘러 평론가를 찾았습니다. 평론가는 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시인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평론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못 들어가겠다…“
그리고 선생님 얼굴을 봤는데, 선생님 얼굴이 온통 바다더라고.
저는 그날 시인이 목격한 평론가의 얼굴이 시의 얼굴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얼굴이 제가 아는 한 가장 두터운 얼굴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6). 바로 그 평론가, 선생님의 선생님이 쓴 문장입니다. 시의 얼굴 안에서는 2014년의 슬픔도, 2022년의 슬픔도 지금 짓는 표정입니다. 오늘은 2023년 4월 16일입니다. 그리고 3,288번째 4월 16일입니다. 당신의 하루가 두텁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두터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이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시는
여기 어디에도 있습니다.
하혁진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