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는 60대 후반의 노인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넉넉하게 살기엔 항상 부족한 수입이었지만 생활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는 직장 생활이 끝날 무렵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렇게 조씨는 홈리스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지역구의 자활근로 사업에 선정되어 선인장 공원에서 시간제 근로를 하고 있었다. 주된 업무는 걷기, 사색하기, 선인장 옆에 앉아있기, 쓰레기 줍기였다. 그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역할은 없었다. 그는 공원 주변의 고시원에서 지냈다. 오래전부터 많은 피해자를 만든 깡통전세 문제를 국가도, 학자도 해결하지 못하자 정부와 국회는 전세 제도가 문제라고 책임을 돌리며 전세를 없애버렸다. 그러자 월세 가격이 크게 올랐다. 아무리 무리해봐야 자기 집을 살 수도, 월세를 낼 수도 없는 사람들이 늘어 고시원 입실료가 올랐다. 자활근로 월급과 기초연금으로 충당하기에 벅찼다. 그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열악한 주거가 아니었다. 더 이상 고기를 먹지 못하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를 전 세계가 실감하고 있었다. 동시에 환경파괴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몇십 년 전 전 세계를 강타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감기처럼 여기는 코로나19의 여파가 컸다. 코로나 이후로 사람들은 계속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일회용품 사용은 나날이 증가했다. 코로나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 이상 쓰레기를 쌓아둘 수 없던 많은 국가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묻고 가라앉혔다. 토양오염, 수질오염, 대기오염 무엇 하나 심하지 않은 것이 않았지만 특히 토양은 매우 척박해져 식물을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더욱 좁아졌으며 기온은 갈수록 올라갔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가로수가 죽어갔고 많은 동식물이 멸종했다. 농촌에선 기존에 기르던 품종들이 쉽게 죽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성공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었으나 품종의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변형했다는 이유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생을 마감하는 농민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서울에서도 이상기후로 인해 식물원이 아닌 곳에서도 선인장들이 마구잡이로 쉽게 자라기 시작했다. 언론과 SNS에서 농민의 죽음보다 더 주목하는 문제는 이곳저곳에서 기이할 정도로 커진 동식물이 심심찮게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초등학생만한 토끼나 자동차만한 거북이가 언론을 탔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씨가 근로하는 공원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큰 선인장이 있었다. 선인장은 빌라 2층 높이에 맞먹는 키였다. 초록 물감에 검정색을 조금 섞은 듯 아주 짙은 초록색의 선인장이었다. 가장 높고 굵은 중심 기둥 주변으로 구부린 팔처럼 이어진 또 다른 줄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젓가락 정도 굵기의 얇은 가시가 촘촘하게 나있었다. 애초에 엄청 큰 종류의 선인장이 있지만 이 선인장은 이렇게 빌라 2층만큼 커지면 안 되는 종이었다. 그래서 몇 해 전 엄청난 세간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이 거대 선인장을 중심으로 선인장 공원이 생겼다.
조씨는 요즘 이 커다란 선인장을 두고 공원을 관리하는 직원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비정상적으로 큰 선인장이 곳곳에 생기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작년 말 인근 도시에서 이 공원에 있던 선인장 둘레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초거대 선인장과 가로등만한 해바라기가 자라났다는 소식이 주민들을 통해 전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은 조씨가 일하는 공원으로 선인장을 보러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선인장의 뿌리가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시의 공무원과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인장을 계속 둘지에 관한 논의가 최근 잦아졌다. 이 공원에서 일하는 많은 노인은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고 그냥 공원을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는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질문도 받지 않았다. 조씨도 묵묵히 선인장 옆에 앉아있거나 주변을 돌았다.
자활근로에서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씨는 여느 날과 같이 공원 인근의 성당에서 나눠주는 무료급식 줄을 서 있었다. 매번 어떻게 간을 했는지 짐작도 안 될 만큼 밍숭맹숭하고 탁한 국에 고기반찬이 나왔다. 기후위기와 토양오염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죽은 동물로 사료를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는 농가가 증가했다. 몇 연구는 이런 농가에 힘을 보탠다며 동물을 원료로 한 사료의 안전성을 주장했다. 이 주장과 방법에 힘입어 고기 생산은 갈수록 늘었고 값도 싸졌다. 하지만 동시에 채소 생산은 어려워졌다. 사업가들은 같은 면적의 부지가 있다면 농산물보다는 축산업을 택했다. 채소값은 올랐다. 조씨는 신선한 채소를 먹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생각하며 비릿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제육볶음을 받아와 한 끼를 해결했다.
노인 인구는 갈수록 많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노인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몇 해 전 한국을 강타한 경제위기로 빈곤노인은 더욱 늘었다. 정부는 노인을 버렸다는 질타를 피하기 위해 숫자로 장난을 쳤다. 노인의 공공일자리 취업률을 늘리기 위해 근로 시간을 쪼개서 파트타임 형식으로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의 취업률은 늘었지만 생활을 영위할 만큼의 수입을 얻는다고 느끼는 노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씨도 마찬가지다. 조씨는 매일 하루가 쓸데없이 너무 길다고 느꼈다. 비록 근로 시간에 하는 일은 없지만 은행잎 색깔의 자활근로 조끼, 선인장과 함께라면 적어도 껍질만 남았다는 느낌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어서 그 시간을 내심 기다렸다.
조씨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가끔 영화를 보았다. 그날도 밥을 먹은 뒤 한국영상자료원으로 갔다. 영상자료원에는 이미 많은 노인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시간 맞춰 간다면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누군가가 신청한 영화가 상영되지만 조씨는 신청 방법도 몰랐을뿐더러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았다. 그날은 영화 <옥자>가 상영됐다. 봉준호라는 감독이 얼마나 큰 상을 받았는지는 그가 한창 자신의 몸을 챙길 새도 없이 일했던 중년 시절에 흘러가는 뉴스로 들었다. 모든 뉴스에서 봉준호라는 이름을 말하고 있었지만 조씨는 혼자 보낸 추석 명절 좁은 방 안에서 TV로 본 <살인의 추억>이 자신이 본 유일한 봉준호 영화임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영화를 챙겨 볼 여유가 없었다.
조씨는 옥자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시골에서 살았던 그의 부모는 축산업 종사자였다. 돼지의 얼굴을 본 이후, 돼지가 죽어가는 소리는 그에게 끔찍한 일상이었다. 엄마가 새끼돼지의 송곳니와 꼬리를 자르는 공간으로부터 도망치듯 나와 조금만 걸으면 바로 제 몸만 한 돼지가 거꾸로 매달려 죽어 있었다. 삶 바로 옆에 죽음이 있는 게 이상했다. 그런 이유로 어릴 적 그는 드물게 상에 올라오는 고기도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조씨의 아버지는 자신이 일구어낸 축산 농가를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잔칫날에만 고기를 먹었는데 너희는 내 덕분에~”로 시작하는 말을 불콰한 얼굴로 자주 했다. 유난히 돼지 소리가 크게 들리던 날, 밥상머리에 앉은 조씨는 돼지가 불쌍해서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일절 없이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모욕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그 이후로는 아무도 식탁에서 연민과 동정의 언어를 꺼내지 않았다. 조씨도 얌전히 고기를 먹었다. 힘줄을 씹는 턱이 힘들었다. 영화에서 옥자와 다른 슈퍼돼지들이 모여 있는 장면은 규모는 달랐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래픽보다 무서운 현실을 조씨는 알고 있었다. 옥자를 본 그날 조씨는 저녁밥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다음날 한층 더 피로해진 조씨는 선인장 옆에 앉아있었다. 조씨는 선인장 옆에 앉아있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이 시간만 편안했다. 선인장은 다른 식물들에 비해 죽어가는 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생명력이 길어 보였다. 선인장은 삶과 죽음이 뚜렷하지 않아서 삶 바로 옆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일련의 과정 같아 보였다. 당연한 섭리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어릴 때 외면했던 돼지들, 그리고 지금 조씨 본인의 하루하루 버티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떤 존재에게 삶은 과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목적이 과정을 삼켜버린 일종의 버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씨는 스스로 살아있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직업을 잃은 이후로 더욱 그랬다. 실업자가 된 후에는 그저 국가가 살려두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사는 느낌이었다. 매시간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흐릿한 퍼센트이자, 빈곤노인 자활근로의 퍼센트라는 국가의 성과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목적이 아닌 껍데기이며 바로 옆에 죽음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외면했던 돼지의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죽음 대신 옆에 있는 선인장을 보았다. 선인장은 여느 다른 식물과는 다르게 좀처럼 흔들리지도 않았다. 죽은 듯 고요했다. 그렇기에 가장 잘 살고 있는 식물 같다고 조씨는 막연히 생각했다.
조씨는 부모님의 직업을 이어받고 싶지 않았고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 이상 끔찍한 비명과 가까이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를 받아준 곳은 플라스틱 공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장비로 머리를 맞아가며 기술을 익혔다. 오랜 시간을 공장의 막내로 일하며 작업이 끝난 뒤 물청소를 도맡아 했다. 하수도로 흘러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양의 분진을 매일 보았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이 정도의 양이면 물고기는 물론 물을 마시는 사람도 죽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흐르는 검은 물을 보면 그저 해산물이 싫어질 뿐이었다. 시골 도축장만 벗어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서울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식은 항상 고깃집 아니면 횟집이었다. 편의점에서 식은 도시락이나 삼각김밥을 사 먹을 때에도 모두 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었다. 꼭 플라스틱을 먹는 것처럼 먹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는 스스로 도시락을 쌀 부지런함이 없었다. 하루에 맡는 일이 너무 많아 눈 뜨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고기나 생선이 먹기 싫다는 이유로 놀림 받거나 맞기 싫었다. 승진을 못 하거나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이런 과거를 회상하던 조씨는 문득 어차피 외톨이가 된 마당에 과거의 걱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뒤 오늘의 식단을 보았다. 꽁치조림과 육개장이 나온단다. 조씨는 무수히 늘어선 노숙인 줄을 보며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씨는 이제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게 되었다. 그는 다른 노인들과 말할 기력을 잃어갔다. 삼겹살 또는 마른안주와 소주로 이어지는 관계가 조씨에게는 사라졌다. 억지로라도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조씨는 매일 선인장 옆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몇몇 노인들이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이제 다른 노인들은 변한 조씨를 보고 수군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조씨의 몸은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이후 하루하루 더 피로해졌다. 조씨는 이대로 살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조씨는 원체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시도해보았다.
조씨는 이전에 몇 마디 주고받은 적이 있던 무료급식봉사를 하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평소 서글서글하게 노인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청년이었다. 그에게 혹시 고기나 생선 없는 식사는 없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역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 설마 채식하시게요? 요즘 그런 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어르신 참 특이하시네.”라고 악의 없는 말투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 옆에 있던 다른 봉사자들도 요즘 채소 가격이 엄청 비싸다고 그래도 어르신들 에너지 내기에는 고기가 더 싼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드물게 보이는 값싼 채소들도 있지만 그것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중간중간 들렸다. 조씨는 그 뒤로 다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매일 조용히 몇 안 되는 야채를 골라 먹었고 조금씩 쇠약해졌지만 눈빛은 맑아졌다.
조씨는 공원 선인장 옆 흙에 이런저런 식물의 씨를 뿌려보기로 결심했다. 덥고 매우 건조한 곳이기 때문에 식물이 싹을 틔우는 걸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몰래 재배해서라도 끼니를 잇고 싶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식물을 키워야 할지 모르는 그는 공부가 필요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런 계획이 들키면 근로에서 잘릴 게 뻔했다. 경쟁률이 심했던 자리라 다른 노인들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멀끔한 도서관은 들어가기 망설여졌고 주변에 갈만한 도서관도 없었다. 새 책은 부담이 돼 헌책방에 가봤으나 전부 오래된 책뿐이었다. 그나마 최근에 발행된 책을 찾아도 한 해가 다르게 변하는 기후와 토양 상태로 인해 몇십 년은 지난 책처럼 느껴졌다. 농업 실용서는 쓸모를 잃고 빠르게 폐기되고 또 빠르게 만들어졌다. 용기를 내 어렵게 종묘상과 원예점을 찾아가 선인장과 함께 키우기에 좋은 식물을 물어보았지만 먹지 못하는 식물, 관상식물만 추천했다. 꽃을 키운다는 것이 부와 여유의 상징이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식단에 육류를 늘리고 무리를 해서라도 창가에 꽃 한 송이를 두었다. 꽃집 주인은 조씨를 그런 ‘퇴직 후 작은 사치를 부리고 싶어 하는 노인’쯤으로 짐작했던 것이다. 조씨는 미보단 삶이 중요하다고 작게 투덜거리며 가게를 나왔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좀 더 편했겠지만 기계 조작에 미숙하고 연락할 사람도 없는 그는 몇 달 치 핸드폰 요금을 모아 씨앗을 샀다. 영양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한 건 알고 있었다. 조씨는 자신이 심은 씨앗이 이상 현상의 대상이 되길 바랐다. 엄청 큰 콩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당장에 사는 게 중요하니 현재로서 안전에 대한 걱정은 콩 한 쪽만큼도 없었다. 조씨는 거의 평생을, 특히 노인이 된 이후로 삶이 너무 끈질기다고 생각했지만 채식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깨닫고 난 후로 자신이 너무 열심히 ‘살고 싶어’ 한단 걸 깨닫게 됐다. 생에 대한 욕망을 오랜만에 느꼈다. 매일 선인장 옆에 앉아 새로운 싹이 트기만을 기다렸다.
조씨는 고시원에서 지낸 뒤로 항상 좁고 습한 방에서 웅크려 꿈도 꾸지 않고 정신없이 잤지만 이제는 자꾸 꿈을 꿨다. 꿈에도 선인장이 나왔다. 현실의 선인장은 자꾸 썩어가지만 꿈속의 선인장은 자꾸만 위로, 옆으로 자랐다. 선인장 옆에서는 선인장과 절대 함께 자랄 수 없는 콩이나 벼와 같은 식물이 쑥쑥 자랐다.
여느 날처럼 거의 쌀밥과 김치만 먹고 선인장 옆에 앉아있던 조씨에게 배식봉사를 온 청년이 다가왔다. 청년의 손에는 얇은 잡지 한 권이 들려있었다. 청년은 예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잡지와 땅콩 한 봉지를 주고 갔다. 조씨는 오랜만에 보는 땅콩을 까먹으며 청년이 준 잡지를 살펴보았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이 알록달록한 지구 일러스트가 한가운데에 있는 잡지의 표지를 펼쳐 내용을 보니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푸릇푸릇하고 알록달록한 채소 음식이 있었다. 잡지를 꼼꼼히 읽던 조는 한 페이지에 시선이 머물렀다. 음식과 농작물을 나누며 로컬 푸드로만 생활하는 비교적 덜 오염된 작은 시골 마을에 관한 특집 기사였다. 작물을 키울 수 있는 땅은 매우 적었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채소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얼마 뒤 젊은 공무원이 조씨와 공원의 자활근로 노인들을 모았다. 옹기종기 모인 노인들에게 공무원은 선인장을 파낼 거라는 소식과 그로 인한 일주일간의 공원 폐쇄를 통보했다. 한때는 비정상적으로 큰 크기로 이목을 끌었지만 심해지는 환경오염과 관리소홀로 인해 조금 썩고 작아진 선인장이 더 이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야기를 듣던 노인들은 웅성웅성 이야기하더니 자신들의 일자리를 걱정했다. 몇 노인들은 조씨 쪽을 보며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예상했던 결정이었기 때문에 조씨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무원이 떠난 후 조씨는 가지고 있던 씨앗을 모두 선인장 주변에 심었다. 몇 노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러는 것이냐며 물었다. 조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노인들은 며칠 말도 안하고 선인장 옆에만 앉아있더니 미쳤나보다고 혀를 차며 지나가기도 했다. 조씨는 이제 이 말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곧 관리인이 와서 당황한 표정으로 조씨에게 원망하는 투의 싫은 소리를 했지만 조씨는 옅은 미소를 띠고 선인장과 씨앗만 생각했다. 선인장 옆에 비슷한 존재들이 산다는 생각에 그는 기쁨을 느꼈다. 꾸중이 싫고 싫은 소리가 무섭고 지겨워 고기와 생선을 먹었고 가만히 남들을 따랐던 60년 세월이다. 그러나 조씨는 싫은 소리를 마주하는 이날,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선인장을 뽑아내는 날이 됐다. 조씨는 고시원을 정리하며 챙긴 몇 안 되는 짐을 배낭 하나에 전부 넣고 방을 나와 공원으로 갔다. 관리인에게 근로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조씨는 약간은 구부정하지만 배식을 받을 때보다 훨씬 힘찬 걸음으로 공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